책과의 만남, 그리고 놀라운 발견
처음 권택영 교수의 《라캉, 장자, 태극기》를 접한 건 대학원 수업 참고도서 목록에서였다. 라캉 정신분석을 전공하는 내게 이 책은 특별했다.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라캉의 이론을 동양철학과 엮어 풀어낸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일었고, 실제로 읽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전공자로서도 라캉의 복잡한 개념들이 이렇게 일상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문체가 묘하게 시적이고 감성적이었다. '권택영'이라는 이름에서 당연히 남자 교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글 곳곳에 스며든 섬세한 감정과 풍부한 정서가 내 편견과 어긋났다. '남자치고는 참 감성적인 글을 쓰시네'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 우리 대학원에서 매학기 종강에 개최하는 콜로키움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다. 선배가 귀띔해주기를, 권택영 교수님이 매학기 콜로키움에 참관하여 지도교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고, 드디어 그 유명한 권택영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권택영 교수님은 여성이었다. 이름 때문에 가졌던 선입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책에서 느꼈던 그 섬세한 감성과 시적인 문체가 이해되었다. 아니, 사실 성별과 글쓰기 스타일을 연결 짓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었다는 깨달음도 함께 왔다.
사랑과 불안의 경계에서
콜로키움에서 권택영 교수님의 강연을 직접 들으며,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사랑이란 나를 지키려는 두려움이 아니다. 진짜 사랑은 너를 위해 울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문장은 단순히 아름다운 수사가 아니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이 압축된 명제였다. 책은 설명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안정과 확신을 얻고자 하지만, 사랑은 결코 소유하거나 독점하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움켜쥐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불안이 된다."
전공자로서 라캉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된 문장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정신분석 서적들이 난해한 용어와 복잡한 이론으로 가득한 반면,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접근 가능했다.
대상 a, 일상 속의 정신분석
책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느낀 부분은 라캉의 '대상 a(petit a)'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대상 a는 라캉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많은 전공서들이 이를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고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권택영 교수는 이를 말랑카우 사탕으로 설명한다.
"어릴 적 말랑카우를 먹다 마지막 한 알이 사라지면, 우리는 '딱 하나만 더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그런데 막상 새 봉지를 뜯어도 금세 다시 허기를 느낀다. 대상 a는 바로 이 '끝없이 더'를 부르는 빈칸이다."
이 설명을 읽으며 감탄했다. 전공 수업에서 한 학기 내내 씨름했던 개념이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다니. 책은 이어서 현대인의 일상으로 개념을 확장한다. 스마트폰 알림을 모두 확인해도 또 확인하게 되는 충동, 넷플릭스를 정주행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 첫사랑의 향기를 비슷한 향수로 재현하려 해도 실패하는 이유. 이 모든 것이 대상 a의 작동이라는 설명은 정신분석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한 훌륭한 사례였다.
고무줄 효과와 사랑의 역설
책에서 제시한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고무줄 효과"라는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연애 초기에 "네가 전부야!"라며 24시간 메시지를 주고받던 커플이 겪는 불안을 라캉의 이론으로 풀어낸 부분이다.
"상대가 곧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을 때 머릿속에 번개처럼 '혹시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충돌한다. 빈칸이 '퍽' 하고 커지면서, 대상 a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설명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겪는 연애의 불안이 단순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욕망의 구조적 특성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책은 명확히 짚어낸다. "문제는 '답장이 오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답장이 채워 주리라 믿었던 빈칸 자체가 본래 채워질 수 없는 구조라는 점에 있다."
무위와 흐르는 사랑
콜로키움에서 권택영 교수님은 라캉과 장자를 연결하는 부분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셨다. 책에서도 이 부분이 가장 독창적이었다. 서양 정신분석학과 동양 철학의 만남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강물은 움켜쥘 수 없다. 손으로 건져 올리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몸을 띄우면 강이 나를 실어 나른다."
장자의 무위(無爲) 개념을 사랑에 적용한 이 비유는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었다. 무위적 사랑은 상대를 통제하지 않고, 각자 고유한 리듬으로 흐르도록 공간을 내어준다는 설명. "구멍(대상 a)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도, 빈칸과 함께 흘러가는 법을 배우는 것―그게 성숙한 사랑이다"라는 통찰은 정신분석과 동양철학이 만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했다.
애도와 창조적 여백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를 인용한 부분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상실은 제대로 슬퍼해야 넘어설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을 권택영 교수는 이렇게 재해석한다.
"빈칸을 인정하지 않으면 멜랑콜리(병적 우울)로 이어지지만, 울고 나면 빈칸은 더 이상 무서운 구멍이 아니다."
책은 구체적인 실천 방법도 제시한다. 울 수 있는 용기를 갖기, 추억을 정리하며 "이제 다른 모양으로 기억 속에 남을 거야"라고 말해주기, "없어도 나는 살아간다"는 새로운 서사 만들기. 이런 구체적인 제안들이 단순한 이론서가 아닌 실용적인 지침서로서의 가치를 더했다.
일상의 실천, 빈칸과 친구되기
책에서 제시한 '빈칸과 친구 되기' 실천법들은 정신분석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었다. 감정 레이블링, 알림 끊기 연습, 작별 의례, 흐름 명상, 서사 쓰기. 이런 방법들은 복잡한 이론을 단순한 실천으로 전환시킨 훌륭한 예였다.
특히 "지금 허전해", "지금 질투 나"라고 속으로 말하는 감정 레이블링은 대상 a의 작동을 의식화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책은 설명한다. "이름을 붙이면 빈칸이 선명해져 다루기 쉬워진다."
다시, 그 문장으로
콜로키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책을 펼쳤다. 이제는 저자의 얼굴을 알게 된 후라 글이 다르게 읽혔다. 성별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해준 것도 이 책이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진짜 사랑은 너를 위해 울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문장이 이제는 더 깊게 다가왔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언젠가 잃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용기. 권택영 교수님이 콜로키움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언젠가 이별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사랑을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라캉 정신분석을 전공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이론과 일상, 서양과 동양, 학문과 시를 자연스럽게 엮어낸 책은 처음이었다. 권택영 교수의 《라캉, 장자, 태극기》는 정신분석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명저임과 동시에, 전공자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는다. "이제 고무줄을 조금 느슨히 놓아 보자. 구멍이 있어도, 아니 구멍 덕분에, 사랑은 더 깊고 자유롭게 흐를 것이다."
대상 a라는 빈칸을 껴안고 살아가는 법. 채워지지 않는 것들과 함께 흐르는 법.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안의 빈칸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충족을 약속하는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칸이 있기에, 그 갈증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을 탐색하고 성장한다.
권택영 교수님을 직접 뵙고 나니, 이 책이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삶의 지혜가 담긴 에세이임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