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이상형을 만날 수 없는가
라캉이 말하는 사랑의 진실
"이번엔 진짜 이상형을 만난 것 같아!"
친구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과연 얼마나 갈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이 이런 말을 하다가 몇 개월 후 "역시 내 이상형은 아니었어"라고 한숨 쉰 적이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상형을 찾아 헤맨다. 소개팅 앱을 스와이프하고, 조건을 따지고,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키는 180 이상, 연봉은 얼마 이상, 유머 감각은 필수, 가치관은 나와 맞아야 하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을 만나도 뭔가 2% 부족하고, 막상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상형을 만날 수 없는 것은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충격적인가?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오히려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거울 속의 나, 그리고 너
아기가 처음으로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알아보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는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자기 몸을 완전히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거울 속에는 완전하고 통일된 형태의 '나'가 있다. 아기는 환호한다. "저게 나야!"
라캉은 이 순간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실제의 불완전한 나 대신, 거울 속의 완벽한 이미지를 '나'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것이 평생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어딘가에서 '완벽한 나'를 찾으려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완벽한 상대'를 찾아 헤맨다.
생각해보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셀카는 몇 번이나 찍고 고른 것인가? 필터는 몇 개나 거쳤는가?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으려 한다. 그리고 데이팅 앱에서 타인의 프로필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진과 프로필을 보며 '완벽한 상대'를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어떤가? 그 사람은 우리의 상상과 다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제 사람'이다. 불완전하고, 불안해하고, 자기 나름의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인간. 우리가 찾던 것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왜 눈이 멀까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라캉의 관점에서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초기 연애를 생각해보자. 상대방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 코 고는 소리조차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코고는 소리가 잠을 설치게 만드는 소음이 된다. 상대방이 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환상이 깨진 것이다.
라캉은 이것을 '상상적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상대방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하나야", "너는 내 반쪽이야" 같은 표현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 - 원래 하나였던 인간이 둘로 나뉘어 서로를 찾아 헤맨다는 - 를 우리는 로맨틱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라캉은 묻는다. 정말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당신과 연인이 정말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완벽하게 이해하고, 완전히 일치할 수 있을까?
답은 명백하다. 불가능하다. 왜? 우리는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아니,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의미하는 것과 상대방에게 의미하는 것은 다르다. '행복'도, '미래'도, '관계'도 모두 다르게 이해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욕망의 미끄러짐
당신의 이상형은 무엇인가? 키 큰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 지적인 사람?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일까?
라캉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키 큰 남자가 이상형이 된 것은 정말 당신의 순수한 욕망일까, 아니면 사회가 그것을 매력적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일까? 마른 몸매를 선호하는 것은 당신의 취향일까, 아니면 미디어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주입했기 때문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이상형 리스트가 끝이 없다는 것이다. "키가 크고" 다음에는 "잘생기고"가 오고, 그 다음에는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가정적이고"... 이 리스트는 언제 끝날까? 절대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그것'을 우리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것을 '대상 a'라는 난해한 용어로 설명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를 욕망하게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은 특정한 물건이나 특성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 톤일 수도 있고, 특유의 제스처일 수도 있고, 눈빛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택배를 기다릴 때의 설렘과 택배를 받은 후의 공허함을 아는가? 이상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을 만나도, 왠지 허전하다. 왜? 우리가 원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남자의 사랑, 여자의 사랑?
라캉은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성관계는 없다." 이것은 섹스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녀(또는 연인들) 사이에 미리 정해진 완벽한 조화란 없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라는 식의 통속적인 구분과는 다르다. 라캉이 말하는 것은 더 근본적이다. 각자는 사랑과 욕망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며, 이 두 방식은 결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은 사랑을 '소유'로 이해한다. "넌 내 거야"라고 말하며 안심한다. 다른 사람은 사랑을 '자유'로 이해한다. "나를 구속하지 마"라고 말한다. 이 둘이 만나면?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현대의 연애 문화를 보면 이것이 더 명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찾아 스와이프한다. 각각의 매치는 '혹시 이 사람이?'라는 기대를 품게 하지만, 곧 실망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운명의 한 사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정말 존재할까?
디지털 시대의 환상
틴더, 범블, 힌지... 현대의 데이팅 앱들은 라캉이 말한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 몇 장과 짧은 소개글로 사람을 판단한다. 스와이프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실제 사람?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상을 투사할 스크린을 보고 있다.
"고스팅"이라는 현상도 흥미롭다.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지는 것. 왜 사람들은 이렇게 할까?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환상이 깨지는 것을 피하려는 시도다. 실제로 만나서 관계를 발전시키면, 상대방의 '실재' - 불완전하고 복잡한 진짜 모습 - 와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브레드크럼빙"(빵 부스러기만 주듯 간헐적으로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가까워지지도,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는다. 왜? 가까워지면 환상이 깨지고, 멀어지면 욕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욕망의 게임을 지속시킨다.
소셜 미디어는 어떤가? 우리는 인스타그램에서 완벽한 커플들을 본다. 행복해 보이는 사진, 로맨틱한 여행, 감동적인 프로포즈. 하지만 그것은 큐레이션된 이미지다. 싸우는 모습, 지루한 일상, 서로에게 실망하는 순간들은 포스팅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들을 보며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가 환상이다.
사랑의 역설
라캉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행복? 안정? 완전함? 하지만 우리 자신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도 불행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그런데 사랑할 때 우리는 마치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도 무엇이 행복인지 모른다. "너만 있으면 돼"라고 말하지만, 정작 상대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거짓말인가? 라캉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사랑을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는 줄 수 없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이상형 너머의 사랑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상형 찾기를 포기해야 할까? 사랑을 단념해야 할까?
라캉의 대답은 둘 다 아니다. 그는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환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키 큰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한다고 하자.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키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자기를 세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왜 나는 키 큰 사람을 원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보호받고 싶은 욕구일 수도 있고, 사회적 시선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다.
이런 탐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럴 때 우리는 '키'라는 조건에서 자유로워진다. 키가 작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다른 면에서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불완전함의 미학
라캉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완벽한 이상형이 없기에 사랑이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완벽한 이상형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더 이상 노력할 필요도, 성장할 필요도, 대화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죽음일까?
실제 사랑은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함께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 아니라 "우리는 각자 온전한 하나"라는 인식. "너만 있으면 돼"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고 싶어"라는 선택. "너는 나의 전부"가 아니라 "너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현실적 인정.
이것이 환상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이다.
마치며: 사랑의 가능성
라캉의 통찰은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이상형은 환상이고, 완벽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니.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오히려 희망적이다.
이상형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눈앞의 실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도 나처럼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는 "미리 정해진 완벽한 조화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직접 관계를 창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뉴얼이 없기에,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사랑을 발명해야 한다.
다음에 데이팅 앱을 열거나 소개팅에 나갈 때, 이것을 기억하자.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어쩌면 실제 사람이 아니라 당신 머릿속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진짜 만남의 가능성이 열린다.
완벽한 이상형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욕망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우리가, 불완전한 사랑을 하며, 그 속에서 완전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라캉이 말하는 사랑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