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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교육-사람을 사람답게

에밀(1)

by going solo

에밀/장자크 루소, 책세상, 황성언 고봉만 옮김/



‘사람이 뭐지, 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나?’


물고기의 본성을 담아 그것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물이죠. 나무와 같은 식물계에 부합하는 것은 토양이고요. 그럼 사람은요? 사람은 어디에 담겨 무엇에 뿌리를 내려야 사람다울 수 있을까요?


첫아이가 태어나던 그날 내 인생에 뜨거운 돌덩이처럼 떨어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부모가 되었고 답이나 있을까 싶은 안타까운 질문에 내 마음이 꿰였습니다. ‘사람다움’이 알고 싶었고 알아야 했습니다.







<글의 순서>

에밀(1)

-들어가는 말 ‘궁극의 교육, 사람을 사람답게’

1. 자연은 진정한 양육자가 될 수 있을까?

2. 루소의 『에밀』은 인간양육의 매뉴얼이 될 수 있을까?


에밀(2)

3. 양육자로서의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4. 나는 답을 찾았나?

-맺는말 ‘나는 아직도 성장하는 중’



-들어가는 말

‘궁극의 교육- 사람을 사람답게’

20대 후반, 첫 아이를 낳던 날, 이제 막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를 안고 울었습니다. 고대하던 아이와의 만남이 반가웠습니다. 매일매일 기다렸으니까요. 열 달을 내 안에 있던 그 아이는 나였습니다. 나의 호흡이었고 나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아이는 나에게서 분리되어 더 이상 나여서는 안 되는 나의 대상이 된 것이죠. 내 삶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으로만 살았던 나의 삶이 이제는 부모로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리라.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 내 새끼에게 먹이고 입히고 싶은 것들이 항상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그날, 반가운 만큼 엄습해 오던 두려움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사람답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슬그머니 내 마음으로 들어온 질문, 그것이 두려움의 정체였습니다. 사람이 뭐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인가? 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나?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을 때는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 질문이 한 아이의 부모가 되던 그날부터는 피하면 안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인생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온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런 게 사람이야, 사람은 그래야 돼.’ 나를 부모로 여기며 또 다른 인생길을 가는 내 아이에게 답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모르니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시행착오를 조금은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교육학의 아버지 루소가 교육의 길로 제시한 본 책을 통해 주장한 양육방식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정리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두 아이를 양육했던 경험에 비추어 주로 반론이 될 것입니다.


질문 1. 자연은 진정한 양육자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은 교감이 필요합니다. 생애의 모든 시기마다 주어진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과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정서적인 감정 활동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성장하게 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어유, 내 새끼!”라고 하시며 등을 토닥이곤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내 나이 사십이 훌쩍 넘은 때까지도 그러셨습니다. 그 음성과 손끝의 느낌, 나를 바라보시는 눈 빛. 나도 내 아이에게 그렇게 합니다. 내가 그들의 등을 토닥이고 머릿결을 어루만질 때 아이는 어떤 느낌일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극진한 애정과 그리하여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쌓였던 것처럼 아이의 마음에도 자존감으로 쌓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자신을 소중하게 아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토록 사소한 일상에서 배우는 존재의 가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의 진정한 힘은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확장되어 가죠. 소중한 존재의 가치가.

하지만 과연 자연과도 그런 교감을 나눌 수 있을까요.


질문 2. 루소의 『에밀』은 인간 양육의 매뉴얼이 될 수 있을까?

첫 아이의 양육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너나없이 미숙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만 아이의 연령과 시기마다 배려해야 할 우선순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아이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도 생겼습니다.


아이는 순하게 잘 따라왔습니다. 초등에서 중등 고등까지 사춘기도 매우 순하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첫 아이와의 8년의 이른 경험은 둘째에 대한 나름의 맵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될 줄 알았습니다. 때마다 큰아이에게 하던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첫아이처럼 안 되더군요. 나의 말과 시도는 아이의 차고 매끈한 표면에 부딪혀 부서졌습니다. 왜지?, 이렇게 하니 되던데?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아이를 보는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또다시 길을 잃었죠. 그리고 오래 한참, 깊은 고민 끝에 나는 중요한 깨달음에 닿았습니다.


사람은 인격체라는 것, 개별적이라는 것, 제각기 나름의 성품에 어울리는 창조력이 있다는 것.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은 일방적인 것이었죠. 둘째 그 아이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풋과 아웃풋을 시스템화할 수 없는 존재. 사람이 그러합니다.


둘째 아이의 성품과 그의 사고체계를 인정하는 걸로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이해를 수정했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고 누군가의 개입을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용히 그 아이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큰 아이는 여전히 행복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도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고군분투 중입니다.


사람을 양육하는 일은 너무나 엄중합니다. 직접적인 양육의 과정, 말하자면 거의 모든 일상에서 개별적 존재로서의 존중과 배려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교육하고 양육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 매뉴얼이란 것은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 존중해 주는 것, 그것만이 전체를 포괄하는 매뉴얼입니다.




에밀(2) 로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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