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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Aug 02. 2023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2017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이다.


눈사람이라고 해도 될 텐데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풀어썼다. 

"제목을 왜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함축하는 의미가 궁금했다. 

"눈은 녹지만 눈사람의 눈코입이 되었던 흑미만이 남았잖아요. 눈은 녹아 증발되고 사라져도 흑미는 남는 것처럼 상처는 남는다는 거 아닐까요?"

버릴 법한 흑미를 씻어 말렸다는 게 의아했는데 같이 읽은 독서 회원의 말을 들으니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장면은 갓 태어난 아기 강윤희와 그 아기가 자라기를 기대하는 삼촌 강중식이다. 

두 번째 장면은 강윤희와 친척 결혼식장. 다정한 부녀관계인 백은호와 백아영부터 강윤희를 불편하게 하는 강 씨 일가족이 대거 등장한다. 등장인물을 모두 소개하면서 강중식을 기술할 때 작가의 독특함이 묻어났다. 강윤희 부모에게 좋은 일을 했던 강중식을 나열하다가 살짝 '세균 범벅인 이물질을 강윤희의 질 속에 넣고 휘젓던 강준식을.' 하면서 의아한 문장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읽은 문장이 뭐야? 하면서 다시 읽게 만들었고, 질 속에 뭘 넣었다고? 이거 확실히 여성의 생식기 질 맞아? 성추행? 성폭행? 뭐라는 거야? 재차 읽게 만들었다.  

세 번째 장면은 친밀한 부녀 관계. 다정하고 길게 묘사되는데, 읽으면서 약간은 불안했다. 아내를 '누나'로 호칭하는 것이 나중에 이상해지는 거 아냐? 싶었다. 누나가 아내가 되는 이상한 관계 말이다.  누나라는 칭호가 더 미묘해지는 건, 강민서도 강윤희를 누나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백은호와 강윤희는 부부지만, 나이차 때문에 누나라 불렀고, 나이 어린 민서는 가족 촌수 때문에 강윤희를 누나라 부른다. 얽히고 얽힌 이상한 가족을 말하고 싶은 건가? 이런 가족 구조가 먹는 음식과 함께 묘사된다. 강원도 음식을 등장시키면서, 좋아하는 음식을 나열하면서.

네 번째 장면은 다시 먹는 이야기와 얽힌 아영이의 성조숙증, 이에 대처하는 아빠 백은호 입장, 엄마 강윤희 입장, 아영이의 틱, 강윤희의 정신과 치료이다. 갑자기 강윤희가 정신과라니, 왜? 아이가 틱이라고 엄마가 정신과에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섯 번째 장면은 강 씨와 백 씨 가족에게 스트레스받는 강윤희이다. 민서와 아영을 불안하게 지키는 윤희의 시선, 부부관계, 피임에 관한 서로 다른 입장. 또다시 의아하게 등장하는 윤희의 성적 갈등과 갈망에 대한 묘사. 그리고 민서의 추석 속에서 호출되는 눈사람, 윤희가 흑미로 눈사람을 만들어 주었단다. 강윤희는 자신이 교사로서 가르치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슬쩍 끼워 넣는다. '인간들은 왜 이러고 사는지.....'  강중식이 한 일을 나열하며 의아하게 한 것처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을 마치 허무주의자처럼 마지막에 내비쳤다. 작가의 특유의 이런 묘사는 낯설게 하기를 위한 장치인가? 

다음 장면은 강윤희와 엄마 이야기이다. 음식에 관한 질문 말고, 진짜 말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 사건, 그러나 엄마와 할 수 없는 이야기라 정신과 의사하고만 말한다고 했다. 남편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강중식과 강윤희. 대화라기보다는 민서의 질병이 자신이 저지는 과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강중식의 한탄, 원망 같은 자책, 그 앞에서 황당한, 아니 정말 식겁한 강윤희가 묘사된다. 

녹아버린 눈사람 앞에서 우는 백아영을 달래는 윤희, "눈사람 없어진 거 아니야. 그냥 모습이 변한 거야." 눈사람을 꾸민 흑미를 말려 유리병에 담았다니. 역시 의아하다. 널리고 널린 게 흑미인데, 그걸 왜 말려. 더럽게...  그냥 버리고 말지. 그래서 이런 의아한 액션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자꾸자꾸 남아서 왜? 를 불러일으키나 보다. 이것도 작가의 테크닉? 마지막은 강윤희 몸속의 울음. 여기서 또 앞서 아영과 민서의 울음 내기가 연상된다. "그럼 우리 엄마는 어떻게 울게?"  팔을 물고 사정한다. 피임하지 않았다. 글이 끝났다.  


첫 장면은 태어난 아기, 마지막 장면은 태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아기. 그 가운데는 어렸을 적 겪은 참담했던 성추행이 윤희의 신경증이 되었고 그녀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유, 불안한 윤희가 가족관계에 얽혀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섹스는 윤희가 바라던 성적 탈출구가 되었을까? 여자의 사회적 위치로 맺어진 계산 속의 부부관계가 아닌 여자의 몸 자체만을 생각하는 섹스?  눈으로 만든 사람의 구조는 이렇게 복잡하게 짜여있다. 읽고 나면 속 시원하고 희열감을 느끼는 그런 글은 아니다. 뭔가 찝찝해서 더욱 깊은 상념을 하게 하는 글이었달까. 인간은 진짜 왜 이러고 사나... 한 번 사는데 좀 잘 살지... 그래서 어떤 평론가가 지옥 같은 소설을 읽었다며 평론의 마지막 문장을 끝냈다. 


독서 동아리에서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눴더니 더 풍부해졌다. 잘 잡히지 않았던 피상적 소설 인물의 심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고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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