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2)
1화에 이어서 진행되는 내용입니다!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먼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프롬의 견해를 보도록 합시다. 프롬은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의 인생관을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소유 양식’, 다른 하나는 ‘존재 양식’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무제한적인 소비와 소유’로 만족감을 누리고, 이 만족감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소유 양식’이라 부릅니다. 여기서는 ‘소유 양식’을 자세히 말해보려 합니다. 소유 양식에 질문의 답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존재 양식’은 뒤에서 다룹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소유 양식을 더 잘 이해하려면 ‘하차감’을 다시 살펴볼까요? 참 신기하게도 1900년생인 에리히 프롬이 ‘하차감’에 대해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소유자는 자동차를 수시로 바꾼다. 한두 해 지나면 헌차에 싫증이 나서 신형차를 물색하며, 되도록 “유리한 흥정”으로 낙착되기를 노린다. ∙∙∙ 자동차는 내가 애착을 느끼는 구체적 대상이라기보다 나의 신분과 나의 자아의 상징이요, 나의 힘의 연장이다. 자동차를 구입함으로써 나는 사실상 새로운 한 부분적 자아를 취득한다.
한 세기 전의 프롬이 오늘날을 꿰뚫어 본 듯한 통찰입니다. ‘하차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차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신분, 나의 상징, 나의 힘’을 드러냅니다. 차가 얼마나 비싸냐, 얼마나 기능적으로 우수하냐에 따라서 자아가 결정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더 좋은 차, 더 비싼 차를 갈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소유 양식의 핵심이 있습니다. 바로 ‘나=내가 가진 것=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입니다. 내 자아가 내가 소유한 것으로 결정되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프롬은 이렇게 상술합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은 주체인 나(또는 그, 너, 우리, 그들)와 객체인 무엇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이 말은 주체나 객체 모두 영속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내포한다. 그렇지만 과연 이 양자가 영속적인 것일까? 나는 언젠가는 죽어갈 것이며,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객체 역시 영속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 가치를 상실할 수도 있다. 무엇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진술은 파괴되지 않는 불멸의 실체를 전제한 그릇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롬은 소유물을 소유하는 ‘나(우리)’를 주체로, 소유물을 ‘객체’로 지칭합니다. 그러고는 주체와 객체의 속성을 지적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영속하지 않음‘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 그 소유물이 처음 느낌 그대로이길 바랍니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은, 소유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대상에만 국한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려 합니다.’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을, 우리가 학습을 통해 얻는 지식을, 사회적 평판과 지위를 가지려 합니다. 소유물에 의지해 안정감을 느끼고,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가졌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대상은 시간 앞에서 무력합니다. 낡아지고 쇠퇴하며, 결국 소멸합니다. 우리의 바람은 결국 ’불멸의 환상‘에 불과하지요.
영속하지 않은 대상에 의존할수록 우리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그 소유물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까요.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커진 소유욕은 더 큰 불안감으로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지요. 바로 이 악순환, 이 악순환이 프롬이 그토록 경계하는 소유 양식의 본질입니다. 더 나아가 소유 양식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프롬의 진단을 들어볼까요?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서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시기해야 하고,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장하듯이 나 자신을 (나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미소를 띤 이성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소유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소유물의 양과 질이 곧 정체성이 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필연적으로 이 과정에서는 힘이 필요한데, 내가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개적이든 은밀하든, 더 가진 자의 것을 빼앗고, 덜 가진 자로부터 내 것을 지키려는 욕망이 폭력을 부릅니다.(여기에 쓰인 ‘폭력’은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심리적 폭력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폭력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과 이타심이 발붙일 틈이 없어집니다. 협력보다는 경쟁을 추구하게 되고, 이 경쟁은 시기와 질투로 점철됩니다. 황량하고 황폐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요.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를까요? 유행하고 있는 ‘플렉스(flex)' 문화를 떠올려 봅시다. 사람들은 명품, 고가의 여행, 고급 음식 등 자신의 소비를 SNS에 게시하며 자아를 표현합니다. 게시물 속 ‘샤넬백’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자신이 ‘성공한 사람’임을 상징하는 상징물인 것이지요. 과시를 통한 쾌락은 일시적이고, 공허함을 낳습니다. 이상적인 SNS 속 자아와 괴리된 현실 속 자아의 모습 때문이겠지요. 이를 메우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소유와 소비를 추구하지만, 괴리만 심화될 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SNS에서 자신의 소비를 과시하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마치 ‘나는 멋져!’, ‘나는 행복해!’라고 인정받으려 고래고래 외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SNS 세상은 마치 누가 누가 더 행복한지를 두고 겨루는 ’행복 경쟁‘ 같습니다. 예쁘게 포장된 타인의 일상을 마주하면, ‘나만 못났고, 초라하네.’라고 위축됩니다. 반면에 나보다 못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의 모습에는 공감보다는 멸시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더 나아.’라고 자기 위로를 하면서 말이지요. 게시물에 달린 시기와 질투가 담긴 댓글을 본다면, 우리 사회를 향한 프롬의 진단이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습니다.
3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