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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책갈피 1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1)

by 황쌤

들어가며 : 나 이런 차 타는 사람이야!


‘승차감’이란 말을 들어봤나요? ‘승차감’은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차체의 흔들림에 따라 몸으로 느끼게 되는 안락한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에도,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에도 승객에게 편안함을 주는 차가 승차감이 좋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요새 등장한 신조어 ‘하차감’이라는 말은 들어봤나요? ‘하차감’은 차에서 내렸을 때 차종·외관 등에 대한 타인의 관심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와, 저 사람 봐. BMW 타잖아!’와 같은 타인의 반응을 즐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하차감’을 높이려면 BMW와 같은 비싼 차를 사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살 테니까요. 한 번 구매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남이 나보다 더 고가의 차를 샀다면, 나는 그 차보다 더 비싼 차를 사야 합니다. ‘하차감’을 중시할수록 더 비싼 차를 원하게 되고, 그 기준은 계속 높아집니다.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수준까지 소비하고, 결국 ‘카푸어’ 신세로 나앉게 됩니다.

‘하차감’, ‘카푸어’라는 단어에서 현대 소비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허영이라 부를 수 있는 소비와 욕심은 비단 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옷에도, 장신구에도, 집에도 허영이 있기 마련입니다. 괜히 우리 한국 사회를 ‘물질 만능주의’라 부르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듭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물질 만능주의’가 나쁘다고 배웠는데, 왜 나쁜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비하고 부를 ‘더 많이, 계속’ 축적하는 게 왜 나쁜 것일까요? 오늘 소개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히 내려줄 거예요. 첫 번째 책갈피 함께 읽어볼까요?


현대 사회 향한 프롬의 시각


프롬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부터 살펴볼까요?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기계 에너지가, 나중에는 핵에너지가 대신하고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가 대신하기까지 산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무한한 생산과 아울러 소비의 도상에 있으며, 과학과 기술에 힘입어서 우리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제2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막강한 존재, 즉 신들이 되어가고 있었고, 자연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물을 지을 벽돌이나 공급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근대 기술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무한한 생산력’을 갖게 됐고, ‘무한한 소비’가 가능해졌지요. ‘무한한 소비’는 자연스레 ‘무한한 소유’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해 모든 걸 만들 수 있으니 모든 걸 살 수 있고, 모든 걸 살 수 있으니, 모든 걸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어 보였고,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생산과 소비의 도구로 삼는 전지전능한 ‘신’에 맞먹는 존재가 됐습니다. 프롬은 이를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를 프롬은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프롬은 ‘행복과 최대치의 만족은 모든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복지 상태(well-being)로 이어지지도 않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롬은 끝없는 소비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더 큰 감각적 쾌락을 원하며,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고 소유하려는 소비자를 향해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보채는 영원한 젖먹이다.”라고까지 일갈합니다. 어찌 보면 꽤 박한 평가입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졌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지상정인데 말이지요. 여러분은 이러한 프롬에게 법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고 싶지 않은가요? 이제 프롬은 왜 ‘무제한적 소비와 소유’가 ‘행복과 최대치의 만족’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 살펴봅시다.


2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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