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3)
2화에 이어서 진행되는 글입니다!
‘소유 양식’에 대한 프롬의 견해를 들어보니 어떤가요? 삶을 성찰하게 되나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극단적인 주장 아니냐?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고 봐요. 프롬이 소유에 극도로 반감을 드러내기 때문이죠. 이런 반감이 든다면, 다음 설명을 들어볼까요?
소유적 실존 양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구분, 즉 기능적 소유와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사물을 소유하고 보존하며, 육성하고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육체와 의식주 그리고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채우기에 필요한 도구들이 이것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기능적 소유는 그것이 인간의 실존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실존적 소유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존에 기여하는, 합리적으로 조종되는 충동이며―우리가 지금껏 다루어 온 성격으로 규정된 소유와 반대의 것이다.
프롬은 모든 소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의식주와 같은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위한 소유는 인정하고 있어요. 그것을 ‘기능적 소유’ 또는 ‘실존적 소유’라고 명명합니다. ‘기능적 소유’는 우리의 ‘생존’에 기여하는 합리적인 충동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논의했던 ‘규정된 소유(’과시적 소유‘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거 같아요.)’와는 ‘반대의 것’이라며 선을 분명히 긋지요. 이처럼 프롬은 모든 소유를 옳지 못한 상태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그 이상으로 가지는 사치를 비판한 것입니다. 물론 ‘생존에 필요하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수적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각자 고민해야 할 부분 아닐까요?
‘소유’에서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쁨을 누려야 할까요? 참된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2화에서 예고했던 프롬이 말한 두 번째 인생관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존재 양식’입니다. 존재 양식은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며 의미를 찾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롬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존재적 실존 양식의 전제조건은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 가장 본질적 특성은 능동성이다. 여기서 능동성이라고 함은 겉으로 보기에 바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상태를 뜻한다. 이 활동상태는 인간에게 주어진 소질과 재능―타고난 정도는 다르지만―천부적으로 갖추어진 풍요로운 인간적 재능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프롬은 존재 양식의 핵심으로 ‘능동성’을 꼽습니다. 이 능동성은 더 가지기 위한 목적으로 바삐 움직이는 분주함이 아닙니다. 소유에 매이지 않은 채로 우리의 힘과 재능을 표출하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내면적 활동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나를 새롭게 하며, 성장시키고 타인을 사랑하게 합니다. 나만을 고려하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을 비롯한 세계에 귀 기울이게 이끕니다. 소유 양식은 외부에 있는 고정적인 대상으로 자아를 규정했다면, 존재 양식은 내면의 잠재력으로 자아를 채웁니다. 비유하자면, 소유 양식은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 같고, 존재 양식은 흐르는 강물 같습니다. 창고는 닫혀 있고 고정되어 있지만, 강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삶을 드러냅니다. 어때요? 알 듯 말 듯하지 않나요? 프롬도 소유 양식보다 존재 양식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소유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빈번히 체험되는 실존 양식이므로 우리 가운데 대다수는 존재적 실존 양식보다는 소유적 실존 양식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존재적 실존 양식을 정의하기 어렵게 만드는 보다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실존 양식의 차이점이 지닌 성격이다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사물이란 구체적이며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는 체험과 관계하며, 체험이란 원칙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 양식보다 존재 양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소유 양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할 수 있지만, 존재 양식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로, 소유는 ‘묘사’할 수 있는 ‘사물’의 영역이라면, 존재는 ‘묘사’할 수 없는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체험’은 ‘경험’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시 말해 존재 양식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해 볼까요? 누군가가 피아노를 배우면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나'를 뽐낸다면, 이는 소유 양식입니다. 하지만 피아노를 치는 순간의 기쁨, 연주의 즐거움을 느낀다면 존재 양식에 가까워집니다.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 소유 양식은 친구에게 어떤 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를 따지는 태도라면, 존재 양식은 친구와의 교류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태도입니다. 소유 양식의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직위와 재산으로 타인에게 존경받으려 하지만, 존재 양식의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능과 지식을 타인과 나누며 스스로 성장하려 합니다. 이처럼 존재 양식은 소유에 의존하지도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소유물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삶의 과정, 경험, 타인과의 관계(이타성), 그리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어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존재 양식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존재 양식으로 살 것을 권하는 프롬의 조언을 들으니,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죠? 긴 인생을 살아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쁨. 그것은 일시적인 쾌락보다는 지속적인 평안에, 감각보다는 내면에 가까우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제 작은 생각을 담아 프롬의 말로 글의 한 꼭지를 줄일까 합니다.
극단적 쾌락주의자가 추구하는 쾌락, 현대 사회에 만연된 쾌락산업과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의 충족은 각기 다른 정도의 말초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시키지는 못한다. ∙∙∙ 쾌락과 말초적 흥분은 절정을 넘어서면 비애의 감정을 남긴다. 흥분은 맛보았지만,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적 힘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생산적인 일의 권태를 타파하려고 시도해 왔고, 한순간은 모든 에너지를―이성(理性)과 사랑을 제외한―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이 되지 않은 채 초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승리의 순간 그는 목표에 이르렀다고 여겼지만―아무런 내면적 변화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그 승리에는 깊은 좌절이 뒤따른다.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 게 바람직해 보입니다만, 과연 말처럼 쉬울까요? 프롬은 존재 양식을 온전히 이룬 예시로 ‘예수’와 ‘부처’를 제시합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이라는 사랑의 절정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절대자입니다. ‘부처’는 자신의 모든 지위, 재산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한 성인입니다. 범인(凡人)이라면 도달하지 못할 높은 경지를 가진 존재이죠. 더군다나 끝없이 욕망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봤을 때, 존재 양식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태도로도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프롬은 단호하게 존재 양식 또한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생각에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프롬의 인간관을 살펴봅시다.
실제로는 소유적 및 존재적 실존 양식 모두 인간의 본성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이며,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물학적 자기보존 본능이 소유 쪽의 양식을 두드러지게 만들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기주의와 게으름만이 인간의 고유한 성향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뿌리 깊이 타고난 욕구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려는 욕구, 활동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가려는 욕구 등. 이 주장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예들은 책 한 권을 쉽게 채울 수 있을 만큼 얼마든지 있다.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 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뿌리 깊게 자리 잡아서 도저히 변화의 여지가 없는 소유적 유형이나 존재적 유형을 대표하는 양극단의 형태는 극소수라는 점, 압도적 다수의 인간에게는 이 두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 -
프롬은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구분 짓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게으르기도 하지만, ‘존재하고자 하는, 뿌리 깊이 타고난 욕구’를 가진 존재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존재하고자 하는, 뿌리 깊이 타고난 욕구’는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려는 욕구’뿐만 아니라,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이자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의 고립을 극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실현과 이타성 그리고 사랑-존재 양식-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지요. 다만, 생존 본능이 ‘소유 쪽의 양식’을 두드러지게 할 뿐입니다.
이러한 프롬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심리학 이론이 있는데요. 바로 심리학자 데시와 라이언의 ‘자기결정성(Self-Determination Theory, SDT) 이론’입니다. 데시와 라이언은 인간에게는 세 가지 심리적 기본 욕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각 욕구를 존재 양식과 비교해 볼까요?
첫째는 ‘자율성 욕구’입니다. ‘자율성 욕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따라 행동하려는 욕구입니다. ‘존재적 실존 양식의 전제조건은 독립과 자유’라는 프롬의 말을 기억하나요? 프롬의 이 견해는 ‘자율성 욕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유능감 욕구’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욕구입니다. 존재 양식의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려는 욕구’에 해당하겠군요. 마지막으로 ‘관계성 욕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욕구이지요. 이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가려는 욕구’라는 존재 양식과 궤를 같이 합니다. 이 세 가지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면, 인간은 자기실현과 복지 상태(well-being)에 도달하게 된다고 데시와 라이언은 주장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보기에도 에리히 프롬과 데시, 라이언의 생각이 비슷하지 않나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유사한 견해를 가진 다른 심리학자도 있습니다. ‘욕구위계이론’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위의 욕구를 ‘자기실현의 욕구’로 설정했고, 바로 아래 단계의 욕구를 ‘존중의 욕구’로 둡니다. ‘자기실현, 관계, 이타성’을 강조한 프롬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까요? 아닐 겁니다. 프롬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에 존재 양식이 새겨져 있다는 이와 같은 증거는 ‘책 한 권을 쉽게 채울 수 있을 만큼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죠.
프롬은 인간에게는 소유 지향적인 성향과 존재 지향적인 성향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며, 그 양자는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이 약화되는 관계라고 봅니다. 우리 안에는 소유에 대한 열망과 존재에 대한 갈망이 모두 있기에,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소유냐 존재냐’라는 두 갈래 길에 선 우리에게 프롬은 결정을 요구합니다.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라고 말이죠. 인생이라는 저울에 소유라는 추를 올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존재라는 추를 올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행복에 닿기를 바라면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과연 소유 양식일까? 존재 양식일까?'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결론은 '존재 양식'을 바라는 '소유 양식'이었습니다. 아마 평생 존재 양식을 추구하지만, 도달할 수 없음에 좌절하며 살아가지 싶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좌절 속에서 삶의 무게중심을 존재 양식에 둘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프롬의 이야기대로 온전히 존재 양식을 이룰 수 없겠지만, 그 비중은 늘릴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이 나만 살아가는 곳이 아님을 깨닫고, 서로 돕고 사랑해 주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안온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여, 성장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 작은 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에 공명하기를 바라며 긴 글 줄입니다.
[참고 자료]
<소유냐 존재냐>_에리히 프롬, 까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_박찬국, 세창 미디어
4화에서는 ‘두 번째 책갈피 <몰입의 즐거움>_미하이칙센트 미하이’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