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 PTSD는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가
나는 complex PTSD 진단을 받은 지 채 몇 년 안 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불안과 우울증에 평생 시달리는 삶이 피할 수 없는 나만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해프닝처럼 우울감을 겪다가 결국 훌훌 털고 다시 자신의 인생으로 복귀하는 이들이 마냥 부러웠다.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5살 때부터 나에겐 아프면 털고 일어나 다시 돌아갈 정상적인 삶이란 없었다. 내겐 원점이자 정상적인 삶이 불안과 우울감으로 항상 가득했고 일상의 불쾌한 일 하나만으로도 매번 나는 벼랑으로 내몰리는 공포에 시달렸다.
어른이 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니 부모의 경제적 요구가 직장 연차가 쌓여 갈수록 불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들의 우선으로 두고 그들의 시중을 들며 살아왔다. 성인이 되자 내가 들던 시중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들은 내 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평생 꿈꿨던 나만의 미래마저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계속되는 요구는 내 멘털의 한계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어렴풋이 20대 중반 정신병동 신세를 졌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울증이 다시 재발하면 내 인생은 정말 이대로 끝이란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내 정신적 문제는 부모의 정서적 학대와 방임으로 비롯되었고 이인증과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도 나타나 일상생활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단 걸 난 30살이 될 때까지도 전혀 몰랐고 의심조차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도 아닌 낯선 땅에 이민을 오고도 부모는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행동들을 계속 이어나갔고 이로 인해 생겨난 모든 문제들을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죄로 내가 다 도맡아야 한다는 것조차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나르시시즘은 극도로 병적이라 편집 성향까지 보였다. 그의 이기심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예를 들어 정신병동에 장기 입원해 있던 나에게 자신의 자동차 보험 처리를 해달라며 병동에 반입금지인 핸드폰을 몰래 넣어주며 나에게 아양을 떨던 그 추잡한 모습이 세월이 지나도 전혀 희미해지지가 않는다. 아빠란 사람도 의절 1년 후 재회하는 자리에서 대뜸 1000 불 좀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질 않나. 생각을 더듬어 보면 그 어떤 힘든 시절에도 부모는 나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나를 어떤 식으로 이용할까 항상 연구하던 사람들이었구나 라는 자각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나를 속박하던 가족이란 굴레를 깨부수고 나와 자유를 찾은 것도 모자라 새로운 땅에 와서 새 인생을 시작을 한다는 상상을 그 시절 나는 감히 할 수 있었을까?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입시에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자기소개서를 통해 나는 지옥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던 대학 시절에 대한 항변을 하는 것 같아 치욕스럽고 부끄럽기만 하다. 수차례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을 했음에도 나는 부모 비자의 스폰서를 하겠답시고 온전 치도 않은 정신에 공부와 일을 병행했고, 막판에는 바닥의 정점을 찍긴 했지만 결국 졸업은 해서 10년을 업계에서 무탈하게 종사했다. 이것이 사실이고 내 내러티브의 전체이다. 하지만 20대 그 시절 나는 무작정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던 패배자로만 내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이인증이 오기 시작하던 때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해서 강의를 무단결석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학사경고를 수번을 받았다, 하던 일도 온전치 못하게 하니 권고사직을 당했고,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자기혐오에 빠지니 그 누구도 내 과제를 좋아해 줄 거 같지 않아 제출하던 길에 과제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었고, 90일 남짓되는 방학 동안 이런 상황을 부모에게 들킬까 두려워 10년 만에 한국을 간다는 핑계로 도피성 여행을 가서 수배령 떨어진 범죄자 마냥 친인척 눈칫밥만 먹으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받았던 수치스러움, 모멸감, 파멸에 대한 두려움, 정신이 무너지며 무쓸모라는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가는 느낌, 세상에게서 결국 튕겨져 나가 낙오자가 될 거란 비관적 믿음, 그나마 순탄하게 인정을 받았던 고등학생 시절에 비해 서서히 평가절하되고 거절당한다는 것에 대한 충격 등.. 이런 것들이 엉키고 뒤성켜서 내 머릿속에 소화되지 못하고 무의식 속 한구석에 똬리를 틀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을 돌아보는 것이 너무 끔찍할 만큼 두려웠고 ‘20대 나 = 책임회피 또는 패배자’.라는 공식을 기정사실인 것 마냥 못을 박아 기억을 재생할 기회조차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런 방어기제로 그 시절 끔찍한 기억이 돌아오는 건 막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퍼즐은 전혀 맞출 수 없었다.
가난을 떠나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을 부모로 두면 아이의 삶은 마치 벼랑 끝에 서있는 것과 같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서 갈라서자는 말로 서로를 협박하는 커플에게 있어서 부부싸움은 그들에게 쌓인 분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레저 스포츠와 같다. 하지만 아무 영문도 모르는 그들의 자녀는 부부싸움 중 내뱉는 협박과 몸싸움 만으로 세상이 끝나 버릴 수 있단 위험부터 직감한다. 이외에도 이 부모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가정에 위협을 가하는 일들, 이를테면 바람을 피운다거나 사돈의 팔촌까지 신용 보증을 서는 일 등등이 어린 자녀로 하여금 이 사단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한다.
어릴 때 사고체계가 잡혀 있지 않을 때엔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보다가 특정 행동을 하게 되면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겠다는 동물적 감각을 기른다. 사람의 기질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착한 아이 신드롬처럼 가정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바짝 엎드리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가장하고 부모에 비위를 맞춰주는 편에 속했다. 이는 내가 부모에게 유별난 애착이 있다거나 그들에게 종속되었다는 자부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날것의 생존 방식이었다. 어떤 위험이 와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거나 엎드려서 상대방에게 살려만 달라고 애원을 하는 타입인데 인간으로서 사회화된지라 살려달라고 절규하기보단 무언의 봉사를 하기를 자처한 것뿐이다.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부모 아래 살면서 나는 내가 한 노력들이 그들의 손으로 인해 무참이 짓밟힐 수 있겠다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경험으로 학습했기도 했고 니와 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나를 유달리 신경성인 타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위, 경제적 여유 그리고 서포트해줄 수 있는 지인들이 개인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중요한 요소라는 걸. 나에겐 가족이란 구성원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해서 정서적 서포트를 받는다는건은 내 첫 30년 생애 동안 상상도 못 해보았다. 이는 심각한 결핍이다. 그리고 대학교 생활을 하던 나에게 어떤 지위가 있었겠으며 가정형편에 돈이 풍족한 것은 꿈도 못 꾸었겠지. 그렇기에 유난히 내 청소년기와 대학교 시절은 위 세 가지 요소가 하나 없었으니 안전장비 없이 외줄 타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조그마한 거절, 불쾌함의 표시 아니면 생각지 못한 데서 일이 꼬인다거나 이런 사소한 문제 하나만으로도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는 죽음이란 늪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극한의 공포가 수십 년 동안 몸과 무의식에 새겨졌다. 개인적인 상황이 180도 바뀐 이 순간에도 내가 제일 힘들었을 때의 트라우마가 불쑥불쑥 올라온다. 이런 플래시백에 말려 들어가게 되면 나는 30대 중반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절 십 대, 이십 대의 나로 빙의가 된다.
여유 자금도 있고 아무런 압박도 받지 않고 한동안은 관광을 다니리라 마음먹었지만 20대 때 학사경고 먹은 게 밝혀질까 두려워 부모에게 둘러대며 한국으로 도망치듯 떠나 죄책감 속에 전국을 누볐던 그 모습에 빙의가 되고 시내에 경제지구에서 바쁘게 다니는 회사원들을 보면 20대 때 중증 우울증을 겪으며 2년 동안 취업의 문을 넘지 못해 계속 좌절했던 모습에 갇히게 된다. 이전의 기억 때문에 현재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이런 플래시백에 말리게 되면 그 시절 느꼈던 공포와 가슴이 미어질 듯한 고통이 함께 따라온다. 과거의 고통이 이렇게 예측할 수도 없게 마구잡이로 재생되는 것은 단순히 삶이 멈추는 불편함이 아니라 삶을 서서히 퇴행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