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아이들만 모인 일명 ‘올빼미 반’이 결성됐다. 그리고 나 역시 올빼미 반에 속하게 되었다.
‘난 왜 이 반에 있는 거지?’
꿈을 포기하며 취직을 위해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건만 갑자기 바뀌어 버린 상황에 한 번씩 의문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기에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내 나이 고작 열여덟 살, 가끔은 부모님께 응석도 부리고 뒤늦은 사춘기로 짜증을 많이 낸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난 또래처럼 굴 수 없었다.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현실 속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고 안정적인 직업이 뭐가 있을까? 어떤 과를 가야 괜찮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도 내가 처한 현실에서 가장 최선이 될 수 있는 과가 어떤 걸지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또, 그 과를 통해 취업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진로를 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난 막연히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격증을 따면 가산점이 붙는 대학교도 있다는 말에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관련 자격증도 따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작정 최선을 다하며 어떤 과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전날 야간 자율 학습으로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오고 입에선 연실 하품이 나는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입맛도 없어 급식을 거르려 했지만 친구는 한사코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급식소로 온 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한 친구에게 너무 고마웠다. 내 최애인 비빔밥이 나왔기 때문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밥에 시금치, 볶은 무, 콩나물, 당근, 버섯 등 먹음직스러운 색감을 뽐내는 채소들이 그 위를 장식하고, 화룡점정 달걀프라이까지 얹힌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했다. 거기에 몽글몽글한 달걀이 들어 있는 달걀국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그래서인지 입맛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난 순식간에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아주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급식소를 나가던 때였다. 배식 상황을 체크하러 오신 영양사 선생님과 마주쳤고, 선생님은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맛있게 먹었어?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음 저기 건의함에 넣어 줘! 선생님이 메뉴에 넣어 줄게. 알겠지?”
역시 지금도, 학생 때의 내게도 먹을 것을 이기는 건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을 메뉴로 넣어 준다고 말씀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는 영양사 선생님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곤 순간, 초등학교 때 영양사 선생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부터 시골에 급식이 도입됐기에, 난 그때부터 엄마표 도시락 대신 급식을 먹었다.
솔직히 급식보다 엄마표 밥이 더 맛있긴 했지만 도시락까지 신경 쓰시는 엄마의 일이 줄어든 것 같아 좋았고, 부잣집 친구 반찬과 내 반찬이 비교되는 일이 없어졌기에 급식이 싫지는 않았다. 가끔 부잣집 남자애가 케첩이 잔뜩 뿌려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 올 때면 부럽기도 하고 비교되는 내 반찬이 창피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계절 내내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반찬을 남기는 것이 허용되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잔반이 없어야 퇴실할 수 있는, 잔반 없는 날이 많았다. 아니, 거의 매일이었다. 그래서 꼭 먹을 만큼만 받아와야 했다. 또, 적게 달랠 수는 있어도 특정 반찬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즈음,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소로 온 난 메뉴를 보곤 깊은 고민에 빠졌다. 미리 알았더라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먹고 싶지 않은 반찬이 눈앞에 버젓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너무도 싫어하는 반찬은 연근조림이었다. 아이들은 원래 야채를 싫어한다지만 난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는 아이였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연근조림만 빼고. 하지만 연근조림도 처음부터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그 사건, 내가 연근을 싫어하게 만든 그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난 연근을 먹지 못한다.
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심리적으로 학교 가는 게 불안해서였는지 잔뇨감을 많이 느껴 화장실에 자주 갔다. 그리고 그런 나로 인해 엄만 걱정이 깊으셨다. 그래서 그런 증상이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셨고, 연근이 방광에 좋다는 소리에 연근을 먹이기 시작하셨다.
우리 동네엔 방죽, 저수지 같은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그 연못을 모두 메워 논이 되었지만 내가 자랄 때까진 방죽이 있었고 그곳엔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답게 폈다. 그렇게 연꽃이 피고 지면 연근이 커다랗게 뿌리를 내리는데 지천에 널린 연근이 딸에게 좋다고 하니 먹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셨을 거다.
그렇게 난 연근을 먹게 됐다. 나도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게 싫었고, 말했듯 채소도 제법 잘 먹는 아이였기에 첨엔 거부감 따윈 없었다. 하지만 먹어보니 내 취향도 아닌 데다 엄만 매끼마다 연근을 주셨기에 매일매일 먹는 건 쉽지 않았다.
“엄마, 나 더 이상은 못 먹겠어. 토할 것 같아.”
“아가,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먹자. 그래야 나아지지.”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두 눈 질끈 감고, 코도 막은 채 연근을 아작아작 씹고 꿀꺽 넘기려던 때였다.
난 맛있게 먹은 아침밥을 비롯해 모든 음식을 쏟아내고 말았다. 토할 것 같더니 내 의지와는 다르게 토가 나와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뒤로 연근만 보면 속이 메스꺼웠다. 그때부터 연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야채로 등극했다. 거의 유일하게.
그런데 하필 급식으로 연근이 나오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배식을 담당하는 여사님께 ‘안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극적이었던 난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연근조림을 세 조각이나 받아오고 말았다.
‘으, 왜 이렇게 많이 주신 거야! 왜!’
기어이 밥과 다른 반찬은 다 먹고 연근과 대치 상황이 일어났다. 친구에겐 차마 연근을 먹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한 채 먼저 교실로 가 있으라고 했다. 한참을 연근과 대치하다 보니 어느새 급식실엔 많은 아이들이 떠나고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그때, 앞에서 식판 검사를 하던 영양사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곤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 잠깐 여기 서 있을게, 얼른 버리고 가. 그래도 노력은 해 봐! 알겠지?”
센스 있는 영양사 선생님 덕에 난 초딩 인생에 찾아온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그땐 영양사가 아닌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영양사 선생님은 그저 감사한 사람으로만 간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의 영양사 선생님이 떠오르며 친절하게 말씀하시는 현재의 영양사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영양사가 되고 싶어졌다.
더욱이 남녀를 구분 짓는 건 아니지만 영양사란 직업은 여자에게 더 잘 어울리는 데다 다달이 월급이 고정적으로 나오지 않는가. 정말 내가 바라던 직업에 딱 부합됐다.
그날 이후 난 영양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봤고 그 결과, 식품공학이나 영양학과를 나오면 영양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영양사의 꿈을 키우며 관련학과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노력과는 달리 수능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에 오기로 마음먹으면서 영어, 수학 학원도 끊고 체계적인 공부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겨우겨우 엄마가 제시한 조건에 맞는 곳엔 합격할 수 있었다. 국립 4년제에. 비록 지방대였지만 내가 원하는 식품공학과에 들어갔기에 그거에 만족하며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내게 다시 꿈이 생겼으니 말이다.
‘반드시 난 영양사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