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위권에 들기(최소 반에서 2등)
2. 컴퓨터 관련 자격증 모조리 따기
3. 면접 연습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새 노트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적었다. 꿈 대신 목표를 세웠기에 그걸 실현하기 위한 세부 계획이었다. 내가 빨리 돈을 벌어야 생각 속 꼬리표로 달고 다니는 ‘엄마 호강시켜 드리기’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했기에 뚜렷한 목표와 실현 계획이 내겐 필요했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다르듯, 호강이라는 것도 받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게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난 그때, 엄마가 원하는 호강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진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단지, 엄마가 호강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를 돌아보면 자식들과 맛있는 음식을 드시거나 함께 여행을 가실 때 종종 그 표현을 쓰시는 걸로 봐선 엄마가 원하는 호강은 거창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전부인 자식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 내가 생각했던 호강은 돈을 많이 벌어 엄마가 일을 쉴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 다달이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반 기업보다 돈을 더 많이 준다는 대기업이라면 더 좋았고. 그래서 꿈을 뒤로한 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열심히 한다면 목표 실현은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1학년 1학기 중반쯤 지나고 있을 때, 학교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너 그 얘기 들었어? 내년부터 대학 진학 반이 생긴다더라? 대학 갈 애들만 추려서 따로 공부시킨대!”
얼핏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부터 학교 전체가 상업고등학교에서 인문계로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가 들리긴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의 특성이 바뀌는 중대한 일이기에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빨라도 내가 졸업을 한 뒤에나 가능할 거라 예상했지만 내 예상은 완벽히 빗나가고 있었다. 인문계로 바뀌기 전 미리 반을 따로 만들어 시범 운영을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인문계로 가려다 내신 따려고 여기로 온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 정신없는 와중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우리 고등학교는 여자상업고등학교로, 옆 건물의 여자 중학교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가 함께 붙어 있던 곳이었다. 앞자리 친군 같은 재단 여중을 나왔고,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전부터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셨거든. 그래서 인문계 안 가고 일부러 여기로 온 애들이 좀 있어!”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내 목표는? 전교 상위권에 들어야 대기업에서 취업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던데 내신을 따기 위해 잘하는 아이들이 이곳에 왔다면 내 등수는? 모든 것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나름 성적이 좋았으나 현실로 인해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로 왔지만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 우리 학교와 함께 운영되던 여중은 근방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많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휴…… 망했다.’
내가 정했던 목표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것만 같았다. 영혼도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고.
그리고 소문은 다시 한번 뒤통수를 세게 치듯 사실로 밝혀졌다. 선생님께서 산만해진 분위기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쐐기를 박으셨기 때문이다.
“내년부턴 대학 진학 반이 생길 거니까 잘 생각해 보고 희망하는 애들만 말해줘. 물론, 성적순으로 잘라 딱 한 반만 만들 거지만. 알겠지?”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며 계속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맘을 다잡아야만 했다.
‘그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했어. 열심히 해보는 거야!’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치러졌고 1학기 성적이 나왔다. 다행히 난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 성적 역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원동력이 됐고, 2학기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1학년이 마무리될 무렵, 겨울 방학을 앞두고 진로 결정이 시급했다. 취직을 준비할지 대학 진학을 할지 신중히 고민하고 부모님과 상의해, 방학 전까지 알려달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목표는 뚜렷했지만 신중히 고민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맘에 걸렸다. 어쩜, 대학교에 미련이 남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고등학교를 택할 때도 난 엄마와 상의하지 않았다. 그저 상업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엄만 딸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이셨기에 고등학교 진로는 순전히 내 의지로 결정됐다. 그런데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니 엄마 의견이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께 학교에서 대학 진학 반을 따로 만든다고 말씀드렸다. 난 당연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지만, 엄만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정말? 막둥아, 그러면 대학 진학 반으로 가면 안 될까? 엄만 네가 대학교는 나왔으면 좋겠거든!”
엄만 인문계를 가지 않은 게 계속 맘에 걸리셨다며 내 나이 때엔 대부분 대학교를 나올 텐데 나도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면 안 되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비록 엄마 혼자 벌기에 사립대 4년제까진 아니어도 전문대와 국립대까지는 보내줄 수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사실 엄마도 공부에 욕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적인 제약으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으셨다. 그건, 엄마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태어나고 자라던 1950년 대엔 가난해서 학교도 못 나오신 분들이 많았지만 엄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못하셨다.
외할아버진 남아 선호 사상이 뚜렷하셨고, 여자는 공부를 잘해도 쓸모없다고 여기셨기에 공부하고 싶어 하는 엄말 지원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엄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주간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공부하며 중고등 학교를 졸업하셨다고 종종 말씀하시곤 하셨다. 대학교도 가고 싶었지만 그것까진 못했다며 대학교에 대한 미련 또한 많이 내비치셨다. 그래서인지 엄만 내가 대학을 나오길 간절히 바라시는 것 같았다. 엄마가 못 해봤던 걸 딸이 대신 이뤄줬으면 하는 맘을 느낄 수 있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취직을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난 다시 기로에 서게 됐고, 그로 인해 고민이 많아졌다.
‘그래, 엄마 꿈을 이뤄드리는 거야. 대학 나오면 좀 더 나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난 다시 진로를 바꿨다.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 그게 내 새로운 목표였다. 하지만 대학교를 가겠다고 해서 접었던 작가의 꿈을 다시 꺼내어 추진할 수는 없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그럼 과는?’
막연하게 바뀌어 버린 상황 속에서 또다시 나는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꿈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향해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고정적인 월급이 나오고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 난 고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