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대학생?’
학생이란 신분은 있지만 백수처럼 놀고먹는다는 뜻의 먹고 대학생. 이 말을 처음들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공부로 지친 우리에게 담임선생님께선 이 말을 종종 해주시곤 했으니 말이다.
“좀만 더 고생하면 편하게 먹고 놀면서 학교 다닐 수 있어. 먹고 대학생! 그게 아마 너희가 될 거다.”
그땐 속으로 ‘아무리 그래도 학굔데 힘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그때를 돌아보니 선생님 말씀은 사실에 가까웠다. 치열했던 중고등학교 때에 비하면 하루에 많아봤자 두세 개인 수업을 소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기준일 수 있고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며 치열하게 대학 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난, 취업을 목전에 두기 전까진 먹고 대학생이란 말이 참 많이 실감 됐다.
또, 대학교에 입학하고 그 시절을 보내며 선생님들과 몇몇 어른들께서 하셨던 말씀 중 엄청나게 커다란 거짓말도 있었음을 알게 됐다.
외모에 신경 쓰던 여고생들에게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신경 쓰지 마! 지금 너희가 외모에 신경 쓸 때야? 대학 가면 살도 빠지고 엄청 예뻐질 거니깐 공부만 해. 알겠지?”
대학 가면 살도 빠지고 예뻐질 거란 말, 그 말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친구들도 나도 살이 빠지지도, 예뻐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대학 생활은 일부 거짓으로 판명된 것도 있지만 즐겁고 편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여유 있는 수업시간표에 봄이면 봄이라는 이유로, 가을이면 가을이라는 이유로 축제를 열고, 엠티도 떠나는 신명 나는 분위기가 날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게다가, 밥 잘 사주는 과 선배들과 동아리 선배들이 있었기에 그 즐거움은 배가 됐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안에서 다시금 생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 우연히 과에서 일등을 하면 등록금을 전액 면제 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엄마께 학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 물론, 영양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고.
그리고 다행히 내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난 1,2학기 모두 과톱을 차지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비에 대한 엄마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며 학교 생활도 즐기다 보니 빠르게 1학년이 지나갔고, 겨울 방학이 되어 2학년 수강 신청을 하려던 때였다.
영양사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는 필수과목들이 수강 신청 목록에서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과 사무실로 전화했다.
“네, 식품 공학과 과 사무실입니다.”
조교님이 전화를 받자마자, 난 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2학년 수업 수강 신청 중인데요. 영양학 관련해서 수강하고 싶은데 컴퓨터에 안 뜨는데요?”
“맞아요. 갑자기 바뀌어서 과 게시판에 공지했는데, 이제 영양학 쪽은 식품 영양학과로 일임돼서 우리 과에선 이수할 수 없게 됐어요.”
헉.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학교를 알아볼 때까지만 해도 분명 식품 공학과에서도 영양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여기에 입학했건만. 꿈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라도 하듯 갑자기 권한은 일임되었고, 식품 영양학과가 없는 이곳에서 꿈을 실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나 미지수일 줄은 몰랐다. 순간, 셋째 언니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셋째 언닌 가끔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나이 먹을수록 맘처럼 되는 게 많이 없네. 그래서 그런지 계획대로 50퍼센트만 돼도 정말 대단한 거라더라.”
그땐 이렇게까지 와닿지 않았는데 언니의 말이 너무 공감됐다.
‘휴… 이제 어떻게 하지?’
난 알 수 없는 인생에서 또다시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결국, 과를 전향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좇던 꿈을 허무하게 포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편입을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고,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대학교에 식품 영양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거리가 멀고 내가 입학한 곳보다 성적이 더 좋아야 갈 수 있었기에 어려움이 따를 거라 예상됐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결심을 꺾고 싶지 않았기에 편입이 가능한 3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학교 공부와 편입 준비를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2학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와 벤치로 향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과 선배와 마주쳤다. 선밴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더니 주위를 몇 번이나 둘러보곤 조심스레 물었다.
“너, 편입 준비한다는 거 사실이야? 영양학과로 간다던데 맞아?”
“네?”
난 선배의 물음에 너무 놀라 되물었다. 사실, 편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 데다 친해진 친구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미안한 맘이 들었다. 그래서 되도록 천천히 알리고 싶어 비밀에 부쳤기에 내가 편입을 준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쩌다 들었어. 근데, 꼭 해야겠어? 내 생각엔 영양사보다 우리 과가 더 괜찮을 거 같은데. 그냥 남아 있음 안 돼? ”
선밴 식품 공학과가 영양학과보다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많을 것 같다며 그냥 이곳에 남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식품 공학을 전공하면 식품 연구원이 될 수도 있고, 식품 개발자를 비롯해 식품 회사에도 취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우리 과는 식품 생명 공학과라 건강 기능 식품 회사로도 취직이 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선밴 취직을 목표로 한 데다 졸업 반이었기에 진로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사실 내가 직접 일을 해본 것도 아니고, 영양사란 직업을 가진 주변인 또한 없었기에 영양사란 직업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단지, 환상 속 존재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선배의 말에 살짝 동요되긴 했다.
그런데 마지막 선배의 한마디가 이어지는 순간, 나의 꿈은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마, 영양사보다 월급도 더 많을걸? 승진하면 월급 오를 기회도 생길 거고.”
‘월급? 돈을 더 많이 준다고?’
어느새 난, 돈이라는 현실과 나의 꿈을 또다시 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