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부터 열정 넘치고, 하고 싶은 게 많은 건 아니었다. 그저 꼬질꼬질한 시골 소녀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한 자락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 하루에 버스도 몇 대 다니지 않는 깡촌.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도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을에 버스가 다니기 전까진 40분을 걸어 큰 도로로 나와 버스를 타야만 읍내에 갈 수 있었다. 물론 버스로도 20분은 더 가야 했고. 행여 마을버스를 놓치기라도 하면 큰 도로로 나와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기에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엔 마을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새벽같이 일어나곤 했다.
부모님은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사시며 농사일에 매진하셨지만 농사로 벌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욱이 우린 땅이 없어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기에 추수해서 도지를 갚고 가족들이 먹을 식량을 남기기도 힘들었다. 또, 내 위론 언니가 다섯이나 있다. 식구가 많으니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건 어쩜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적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조금은 힘든 삶을 살았다.
언니들은 유치원도 나오지 못한 채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학교에 입학해야 했을 정도로 살림은 빠듯했다. 그래도 난 막내 특권으로 집에서 유일하게 유치원을 나왔다. 내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나이를 속인 거야?’라며 코웃음을 치지만 우리 집 형편상 유치원은 특권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누린 특권은 친구들에겐 당연한 권리였고, 사교육을 통해 이미 한글을 깨치고 사칙 연산을 익힌 후 입학한 아이들 틈에서 수업을 따라가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저 유치원에서 동요 몇 개와 만들기 조금, 길거리에 즐비한 꽃과 곤충 이름을 배우고 학교에 올라가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한글도 떼지 못한 채 학교에 입학한 난, 나머지 공부를 하는 날이 많았다. 지금은 체벌이 없어져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선생님께 손바닥과 발바닥을 맞으며 한글을 힘들게 떼었다. 사칙 연산도 겨우겨우. 그래서 그땐 담임 선생님이 너무 싫었고 학교생활 또한 즐겁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겨를도, 꿈을 키울 여력도 없었다.
내 시점에서 운이 나쁘게도 너무 싫어했던 1학년 담임 선생님을 2학년 때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1, 2학년을 힘겹게 보내고 내게 꿈이 생긴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부터였다.
한글과 연산을 어느 정도 깨치고 3학년에 올라가니 공부에 재미가 느껴졌다. 또, 공부에 흥미를 느끼니 맘씨 좋은 담임 선생님은 더 많은 것을 알려 주려 노력하셨고, 형편이 어려운 나를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챙겨주셨다.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 순탄한 3학년을 지내고 있을 여름 무렵, 안 좋았던 가세가 더 기울고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셨다. 병을 앓고 계셨기에 갑작스럽다는 표현이 맞진 않지만 늘 곁에 계실 것 같던 아빠가 내 곁을 떠나신 건 어린 나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농사를 업으로 삼으셨던 엄만 아빠의 부재로 더 이상 혼자 일을 하실 수 없게 되었고,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공장 일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빠의 병원비로 빚까지 늘어 수입이 거의 없는 농사일에 더 이상 연연하실 수가 없었다.
엄만 아침 일찍 일을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시고 중고등학생이 된 언니들도 늦게 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난 늘 외로웠다. 엄만 최선을 다해 내 맘을, 우리 마음을 헤아려주려 노력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외롭지 않은 척, 애써 밝은 척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힘들고 외로운 맘을 맘껏 표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담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선 외롭고 어렸던 날 많이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또, 아빠처럼 다정히 대해주셨다.
그런 담임 선생님을 보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 그게 내가 처음으로 원한 장래 희망, 나의 첫 번째 꿈이었다.
당시 선생님이란 직업은 위신이 높고, 사회적 인식 또한 좋았기 때문에 부모들이 원하는 자녀의 진로 1순위였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어린 내가 엄마께 “엄마, 나 선생님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자 엄만 너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때부터 나도 원하고, 엄마도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난 큰 열정을 가졌다.
솔직히 말해 중간중간 너무도 다양하고 많은 직업이 있어 살짝 흔들린 적도 있었다. 아마, 기억 속 자리하고 있는 현모양처의 꿈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흔들리던 때에 잠시 머물다 갔던 것 같다. 가끔 엄마가 편찮으실 때면 의사가 되고 싶기도 했고, 노래하는 게 좋아 가수를 꿈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은 잠시 숨어 있었을 뿐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가진 꿈은 중학생까지 이어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글쓰기 대회가 열렸다. 평소 끼적이는 걸 좋아하던 나는 엄마와 관련된 수필을 정성껏 적어 대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우수상을 받았다. 최우수상은 아니었지만 내가 쓴 글로 상을 받았다는 게 무척 기쁘고 짜릿했다. 그저 좋아서 조금 끼적여봤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내 꿈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난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작가를 꿈꿨다. 내가 주인공을 직접 캐스팅하고 연출하며 서사를 그려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난, 이야기를 꾸며나갈 수 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 시시콜콜한 것도 끼적이며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쓰는 것에 비해 책을 읽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지만 책을 많이 읽으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해 도서부에 들어가 책도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난 중학교 2학년이었다.
1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됐을 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담임 선생님과 진로 상담을 해야 했다. 선생님께선 결정해 둔 고등학교가 있냐며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셨고, 난 당연히 문과에 진학해 국어국문학과나 문학과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글 쓰는 걸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때만 해도 고등학교 진학은 내신 성적과 학력평가를 합산해서 합격해야만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었기에 성적이 되지 않으면 선생님들께선 원서를 써주지 않으셨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께선 인문계에 갈 수 있는 실력이라며 그렇게 진행해 보자고, 내 꿈을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1학기를 지나 2학기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난 급하게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작가들은 돈은 많이 못 벌지 않냐?”
은연중 현실을 이야기한 친구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고, 그 뒤로 현실이 다가와 내게 말했기 때문이다.
“꿈 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