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띠리리’
아이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현관문이 닫히면 맘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오예! 커피나 한잔 마실까? 아님, 좀 더 잘까?’
드디어 기다리던 자유 시간이다.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잠시 여유를 즐기다 일을 시작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이젠 일상의 일부인 자유 시간, 하지만 이 시간이 주어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결혼 후 아기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자유시간은 없었다. 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까진 자유 시간은커녕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밤중 수유는 기본이요, 수시로 울어대는 아이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줘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6개월 무렵이면 이유식을 시작하는데 이유식을 만들고, 먹이고 정리하는 일이 추가되니 더욱 힘들었다. 또, 걸음마를 하는 순간부턴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이며 저지레를 하고 다니기에 밀착마크가 필요했다. 거기에 티 안 나는 집안일까지. 살림과 육아의 병행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 시간을 갖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니, 내 시간은 고사하고 화장실이라도 맘 편히 가고 싶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다 자유 시간이 생긴 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이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 때 어린이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그전까진 문화센터와 집 앞 놀이터를 통해 또래 아이들을 만나게 해 주며 아이의 발달을 도왔다. 그러다 20개월부터 아인 빠르게 말이 늘었고, 의사 표현도 가능해졌다. 그래서 27개월이 되던 그해 3월,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땐 불안해서 집안일도 손에 안 잡히고, 주어진 시간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점차 사회성이 커지고 말과 행동이 느는 아이를 보며 차차 안심했고, 소소하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비로소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주어진 자유 시간을 잘 보내며 나를 돌볼 줄 알아야 오버타임 업무가 자주 발생하고 주말 업무가 기본인 집안일과 육아에서도 악마로 변하거나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건 내 일상 중 한 조각이었다. 그런데 거울 속 모습을 보는 순간, 아줌마란 단어와 함께 기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휴…… 나 왜 이래?’
눈 밑도 퀭한 게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당당하고 열정 넘치며 늘 매무새에 신경 썼던 나였는데 대체 언제, 또 어떠한 이유로 왜 이렇게 변해 있는 걸까.
결혼하고 육아를 하며 나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내 옆에서 나를 의지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나름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예고 없이 현타가 찾아왔고, 현타와 함께 꿈 많던 어린 날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릴 때의 난,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세상에 직업이 너무 많아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중, 지금 내 삶과 가장 유사한 현모양처를 꿈꾼 적도 있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을 반기며 재킷을 받아 옷걸이에 걸고, 토끼 같은 아이와 함께 도란도란 앉아 정갈하게 차려 놓은 12첩 반상을 맛있게 먹으며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던, 아이의 공부를 봐주고 고민을 상담해 주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런 때가 생각났다.
‘흠…… 그때 꿨던 꿈은 이뤘다고 해도 되는 건가?’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난 나름대로 남편을 잘 내조하는 여우 같은 아내고, 아이에겐 상냥하고 다정하며 때론 조언도 해줄 수 있는 현명한 엄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12첩 반상까진 불가하고 앞에서 말했듯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꿈을 생각하고 그 시절을 생각하다 보니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꿈 많고 열정 넘치던 그때의 모습을.
‘가져오길 잘했네!’
얼마 전 친정에 갔다가 엄마가 고이 모셔둔 앨범을 발견했다. 나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이 담긴 앨범들이 시절별로 세 개나 됐다. 나이를 먹으며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혼자 꺼내어 보고 싶었던 선견지명이었을까. 언니들 것까지 열 개가 넘는 앨범 속에서 그중 내 어린 시절이 담긴 세 개의 앨범을 친정에서 가지고 왔다.
먼지가 묻은 앨범을 휴지로 대충 닦고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앨범을 넘겼다. 그중 시선을 멈추게 하는 사진이 있었다. 유리와 나란히 서서 브이를 하며 찍은 고등학교 때 사진이었다.
‘유린 지금 잘 나가는 CEO 지…….’
두 번째 현타가 달려와 내 뒤통수를 쳤다.
유리와 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나온 친한 친구다. 그때의 유린 적당히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잘 나가는 CEO가 될 거란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의 성적으로만 본다면 유리가 맡고 있는 CEO란 직책은 내가 맡았어야 했다. 하지만 유린 열심히 노력해 CEO가 되었고, 난 평범하디 평범한 전업주부라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가끔 유리와 함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삶을 살며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골프도 치러 다니고 필라테스도 하며 몇백만 원씩 하는 피부관리를 서슴없이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땐, 피어오르는 자격지심을 누르고 ‘뭐 나도 나름 잘 살고 있어!’라는 말을 속으로 하며 애써 맘을 다독였다. 그렇게 다독여진 맘으로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내 삶에 만족하며 지내자고 다짐했었는데…….
현타를 직격타로 맞은 지금, 유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내 모습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분명,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타라는 녀석이 왜 나를 찾아온 걸까? 내가 행복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래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난 작은 것에도 소중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름 행복 지수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동안 공허함과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난 무언가 해보고 싶은 거였다. 이따금 무료함 속에서 느꼈던 우울감이 이루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열정을 은연중 생각나게 했고, 기어이 본색을 드러내게 했단 걸 말이다.
거울 속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지금의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넌 지금 무얼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