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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호 Jul 30. 2024

낭만국밥

구매목록: 영양순대국, 소주 '참이슬'

 나는 악덕 기업이 주는 돈으로 먹고산다. 악덕 기업이라 칭하는 이유는 내 개인적인 생각만 담긴 것은 아니고 이미 업계에서는 진상으로 유명한 악덕 기업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편의상 이 기업을 ‘S’라고 칭하겠다. 사명을 뜻하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계약 성사 후 킥오프 미팅에서 양사의 담당자들이 모두 모인 첫 미팅 자리였다. 그들은 미팅 내내 상냥한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 그런데 그들 이 뱉은 말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일하시다가 업무가 벅차시거나 힘드시면 저희한테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누군가는 배려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첫 미팅 때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광고 업계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통상적으로 첫 미팅 때는 인사 목적으로 앞으로의 업무 진행 방향성 정도만 가볍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 담당자가 시작부터 저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업무량이 많고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어쩌면 겁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첫 미팅이 끝나고 6개월이 지난 지금 그 미팅 자리에 있었던 담당자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퇴사했다. 팀장님은 한 번 바뀌었고 시기는 다르지만 한두 명씩 같이 일했던 총 5명의 담당자들이 모두 바뀌었다. 광고주와 트러블이 생기거나 컴플레인이 들어올 때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이상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S사와 일했던 다양한 협력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진상이었던 것이다.  S사와의 계약 후 업무 인수인계받던 날 전대행사 담당자들은 홀가분해보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들떠 있었다. 며칠 뒤 전대행사에 업무 때문에 연락을 드린 적이 있는데 팀장님은 자유를 찾아 떠나신다며 퇴사하셨고 담당자들은 S사와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모두 15박 16일로 휴가를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이다. 매년 일이 바빠지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를 우리는 성수기라 고 부른다. 인력은 그대로인데 일은 많아져서 이 시기엔 모두가 예민해지곤 한다. 그런 예민함이 겉도는 시기엔 마치 시한폭탄처럼 사건이 꽝하고 터지기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S사는 매년 대형 캠페인을 진행한다. S사의 가장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시즌이기도 하며 가장 바쁜 시기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홍보해야 될 서비스도 많았고 촬영해야 할 제품도 많았기에 우리는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했고 매일매일 새벽에 퇴근해야 했다. 앞으로 큰 규모의 프로젝트와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인력 증원을 꾸준하게 요청했으나 내부 사정으로 회사 매출상 인력을 더 늘릴 수 없었다. 경력직을 뽑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우리 회사는 기간제 인턴으로 쏟아지는 S사의 물량을 버텼다. S사는 우리 팀의 인력 구성에 불만을 가졌다. 팀장 1명, 5년 차 1명, 고작 인턴 2명으로 S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못마땅해했다. 상대적으로 덜 바쁜 시기엔 일을 어떻게든 소화해 냈지만 물량이 많아지자 점점 벅차기 시작했다. S사의 끊이지 않는 수정 요청과 쏟아지는 업무들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들이 반복되자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사실 번아웃이 온 건 꽤 오래된 일이지만 별 수 없으니 모두가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일을 쳐내는 속도가 점점 지연되기 시작했고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평소에도 S사는 ASAP 요청 건이 많은 조직이다. 이 조직의 일은 보통 퀄리티보단 빠른 속 도로 쳐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우리는 이 조직의 속도나 업무량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작한 콘텐츠들의 디자인 퀄리티를 문제 삼아 컴플레인을 걸었고 점점 수십 번의 수정요청을 거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작은 사건들이 여진처럼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며칠 내 문제가 터졌다. 특정 콘텐츠에 대해 광고주가 강하게 컴플레인을 걸었고 단톡방 분위기는 냉랭했다. 못된 감정이 담긴 문장들이 단톡방을 빠르게 점령하며 목을 조였다. 숨이 턱 막혀 단톡방을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총대는 멘 건 나였다. 메인 커뮤니케이션을 맡았던 프로젝트 매니저(PM)였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대응을 해야 했다. 내 전화기는 이미 불이 날 정도로 컴플레인 전화가 쏟아졌고 사실 지칠 대로 지친 나도 대응하기가 꺼려졌다. 광고주가 토해내는 불만을 내가 잘 대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통화하기가 두려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차장님” 

“대리님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거 디자인 누가 작업해주신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대리님 눈에는 이 디자인이 예뻐요? 

“아 넵 차장님, 저희 디자인의 의도는 경품에 시선이 집중할 수 있도록 크기나 이벤트 문구 중심으로 레이아웃을 잡았던 거구요. 배경에 서 크리스마스 무드를 주기 위해 레드, 그린, 골드 컬러를 적절히 활용하였습니다.” “아니요. 알겠는데요. 저희 솔직히 이 디자인으로는 콘텐츠 발행 못하겠어요.” 

“혹시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신 걸까요?” 

“대리님 진짜 솔직히요. 디자인 이 너무 촌스러워요. 대리님이 봐도 촌스럽지 않아요?” 

“아.. 네 그런데요. 차장님 사실 차장님이 말씀 주시는 디자인 피드백들은 주관적인 부분이라 저희가 명확하게 반영해 드리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희가 또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 레퍼런스 전달드리면서 제작 전에 컨펌받으면서 진행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서요. 혹시 차장님이 원하시는 디자인이 따로 있으시다고 하면 저희에게 레퍼런스 형태로 전달해 주시면…ㅈ” 

“대리님 제가 또 회의 들어가 봐야돼서 길게 통화는 못하고요. 이거 해주신 기획안도 보면 보내주신 레퍼런스랑 제작물이 너무 달라요. 지금 정말 바쁜데 저희가 기획안 하나하나 어떻게 다 봐드려요. 신경 좀 더 써주세요. 팀장님한테도 따로 말씀드리긴 했는데 저희 크리스마스 진짜 중요한 캠페인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가 디자인 레퍼런스 몇 가지 더 보여드리고 컨펌해 주시면 수정해서 제작물 다시 전달드리겠습니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단전에서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상황에 기도 빨리고 몸과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마음속으로는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었다. 통화 내용을 팀장님께 보고하고 제작팀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제작팀도 광고주 태도에 당연히 화가 났다. 제작팀의 입장도 있었다. 디자인 레퍼런스는 어디까지나 작업 방향성의 참고용이어야 한다. 결과물이 레퍼런스랑 똑같다면 그건 표절이 아니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어찌 됐든 벌어진 문제는 해결해야 했기에 제작팀과 어떻게 할지 조율했다. 콘텐츠 발행이 내일인데 제작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재 시각 23시 20분. 우리는 대안점을 찾아 제시했고 단체 카톡 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광고주는 우리가 보낸 메시지에 답변하지 않았다. 전화도 드려봤지 만 받지 않았다.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답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광고주 내부적으로 내린 판단 같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우리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작업할 힘도 없었다. 새벽까지 작업해서 보내도 광고주는 오늘 확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팀장님은 대책 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셨고 우리는 퇴근하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에 새벽이 되기 전에 퇴근했다. 나는 출퇴근할 때 항상 유튜브를 보곤 하는데 우연히 알고리즘에 뜬 <성시경의 먹을텐데>를 봤다. 뜨거운 국밥에 시원한 소주를 먹는 성시경을 보면서 군침이 흘렀다. 정확히는 성시경을 따라 하고 싶은 욕구였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 순간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바뀌었다. 어릴 땐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면 안 좋은 일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직장인이 되고부턴 집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아 잠을 마음대로 잘 수 없었기 때문에 퇴근 후에 맛있는 음식과 어울리는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친구들과 만나서 마시는 것도 좋지만 혼자서 마시면 과음을 하지 않고도 짧은 시간 내에 술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술이 좋아지기 전에는 단순히 술의 쓴맛 때문에 꺼려 했었다. 그래서 혼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술은 친구들과 놀 때 할 게 없어서 마시던 거였는데 내가 지금 혼술을 즐기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딴 길로 샜다. 동네 24시 순대국밥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그냥 순댓국이 아닌 인삼이 들어간 영양순댓국을 먹기로 했다. 참이슬도 함께.

동네 순댓국집이 좋은 이유는 혼술을 해도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일하고 오신 것 같은 작업복 입은 아저씨들이 혼자라도 식당에 오셔서 끼니를 때우며 반주를 함께 즐기시기 때문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중 하나가 되었다. 


 웨건 위에 펄펄 끓는 순댓국을 아주머니가 내 앞에 내려주셨다. 이어서 하얀 살얼음이 소복이 쌓인 소주가 소주잔과 함께 테이블에 놓였다. 새우 젓갈과 다데기로 간을 하기 전에 기념이라도 남기고 싶었는지 휴대폰 카메라로 맛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댓국과 시원한 소주를 담은 소주잔이 한 컷에 담기도록 사진을 찍어 친구들이 있는 메시지 단톡방에 공유했다. 친구들의 반응을 기다릴 새는 없었다. 사진 전송을 누르자마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썰려 있는 청양고추를 털어놓고 들깨가루는 이렇게 넣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듬뿍 뿌린다. 그리고 새우젓으로 간을 살 짝 맞춘다. 깍두기 국물과 다데기는 지금 나설 차례는 아니라 잠 시 대기한다. 국물을 식힐 겸 숟가락으로 살살 휘저었다. 국물 한 숟갈을 떠먹어보니 구수하고 깊은 국물 맛에 몸속 단전에서부터 걸쭉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셀프바에서 쌈장과 새우젓을 퍼왔다. 그리고 공깃밥 앞접시에 큼지막하게 썰린 부드러운 고기와 김밥 꽁다리처럼 속이 꽉 찬 순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뚝배기 속 국물을 숟가락 질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건더기를 걷어냈다. 이제 나에겐 술안주로 국물 안주와 고기 안주 2개가 준비된 셈이다 


 소주 잔을 들어 참이슬 병에 소심하게 짠을 하고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하.. 이거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이거였어” 흐뭇한 마음으로 소주 세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그리고 앞접시에 덜어놓은 고기와 순대를 쌈장과 새우젓에 마치 소스처럼 찍어 먹었다. 국물이 반쯤 줄어들었을 때 기다렸던 깍두기 국물과 다 데기를 국물에 풀었다. 바로 이때가 하얀 담백한 국물에서 매콤 한 빨간 국물로 탈바꿈되는 타이밍이다. 기호에 따라 청양고추를 더 넣기도 한다. 자극적이고 매운 국물로 2차 안주를 먹는 셈이다. 해장과 동시에 술을 먹는 느낌이랄까 오늘따라 소주 목넘김의 부드러움이 예사롭지 않다.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소주 한 병을 빠르게 비웠다. 내일 출근도 있기 때문에 아쉽더라도 이쯤에 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슬슬 잠이 온다. 유난히 힘들었던 오늘이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나름 위로가 됐다. 출근하기 싫은 건 변함없지만 언짢은 기분을 달래주기엔 충분했다. 때론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는 것보다 혼자 조용히 해소하는 것도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내 상태를 구구절절 말하는 게 어쩌면 피곤한 일일 테니까. 


 뚝배기에 수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친구가 이런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국밥 혼술은 낭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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