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전쟁은 완전한 나의 승리
-1차 전쟁은 완전한 나의 승리-
방안은 텅 비었다. 마치 누군가 불도저로 자국이 남게 밀어버린 것처럼, 벽도, 바닥도 헐겁게 드러나 있었다. 오래 숨겨뒀던 나무의 속살 같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햇볕 한 번 못 본 자국들, 눌리고 긁힌 흔적들, 여태껏 내가 등 돌리고 살아온 낡은 면면들이 죄다 드러났다. 바닥엔 먼지와 오래된 종이 살점들이 나뒹굴었다. 내 기억도 저기 끼어 있겠지. 방도 나도 그렇게 닳고, 낡고, 부스러졌다.
벽 구석에 쌓인 자잘한 못들과 나사 조각들이 보였다. 딱 봐도 어디서 빠진 건지 기억도 안 나는 것들이었다. 가끔 사람 마음도 저런 식으로 흘러나온다.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모르 겠지만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다. 딱히 주워 담을 필요도 없었다. 버려도 티 안 날 것들이니까. 방도 그렇다. 그렇게 흘리고 버리고 나면 결국 남는 건 텅 빈 공간뿐이다.
새 가구들이 올 생각을 하니, 잠깐 마음이 붕 떴다. 하지만 그런 설렘도 잠깐이다. 어차피 그것들도 적이 될 거다. 처음엔 반짝이고 단단하고 멀쩡해도, 결국엔 긁히고, 흔들리고, 어느 순간엔 지겨워진다. 사람 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다. 좋아하다가, 질려하다가, 결국은 버린다. 질리는 속도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을 많이 걸진 않았다. 기대는, 늘 멀리 두는 게 편하다.
그래도 빈 방을 보는 느낌이 이상했다. 숨을 참았다가 푹 내쉬는 느낌 같았다. 어쩌면, 조금 비워야 새로 숨 쉴 공간이 생기는 걸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방은 내 숨을 틀어막는 공간이었으니까. 벽에 바짝 붙어 걷던 습관도, 구석을 피하던 발걸음도, 이제는 다 끝났다. 공간은 넓어졌고, 머리는 조금 멍했다. 그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했다.
구조를 바꾼다는 건 늘 그런 거다. 죽여야 할 것과 포로로 묶어둘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 고장난 가구나 낡은 옷만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공간을 정리한다는 건 결국, 마음 정리랑 별반 다르지 않다. 비워 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 사이를 쳐다보다 보면, 괜히 오래된 생각들이 따라 올라온다. 그걸 버릴지는 또 다음 문제다. 일단은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치워야 한다.
한동안 손 놓았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확 들어왔다. 먼지 섞인 공기가 방 안을 휘저었다. 낯선 냄새와 오래된 냄새가 섞여 어지러웠다. 그 냄새 속에, 내가 버린 것들도, 남긴 것들도, 앞으로 들일 것들도 섞 여 있었다. 다들 뒤섞여서, 딱히 구분이 안 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분명히 원가를 정리했다 싶어도, 결국 다시 어지러워질 테니까.
새 가구들이 오면, 또 이 평화는 깨질 거다. 설치하고, 자리 잡고, 다시 또 부딪히고, 눌리고, 긁히고. 결국, 그게 반복이다. 아마 처음엔 괜찮겠지. 다들 그런 척하며 살아가니까. 나도 그 사이에서 잠깐은 그런 척을 할 생각이다. 잘 지내는 척, 좋아하는 척, 정든 척. 그 정도 연기는 이제 능숙하다. 오래 쓰다 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잠깐은 기대해도 괜찮다.
방은 여전히 빈 상태였다. 싸움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았지만, 이 정도면 깔끔한 편이었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날이다.
방 하나 치운다고, 마음까지 말끔해질 리는 없으니까. 대신, 가구를 다 들이고 나면, 또 몇 년쯤은 버틸 수 있겠지. 그렇게 또 살다가, 또 질리고, 또 싸우고, 그게 뭐 별거냐 싶었다.
결국 남는 건 방이 아니라, 버텨온 시간뿐이다. 이 공간에서 쌓아온 피로, 애정, 짜증, 그리고 이번엔 조금의 기대. 남들 보기엔 그냥 구조 좀 바꾼 거고, 나한텐 또 다른 싸움의 기록이다. 다음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텅 빈 방 한가운데 서서, 오래 넣어두었던 자존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뭔가를 찾는 척하다 말고, 그냥 웃음만 새어 나왔다. 뭘 그리 어렵게 굴었나 싶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