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머리가 터졌다를 읽으신 후 읽으시면 더욱 재밌습니다.
-루체테씨 사용법-
해호미를 너무 사랑해서일까요. 그간 해호미만 소개해 드린 것 같네요. 루체테는 참, 한때 완벽했던 존재였는데 말이죠. 이제는 너무 자주 만난 탓에, 그녀를 온전히 운명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작자가 남자인 관계로 사장님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카페 자체를 여성으로 지정했다)
꽤나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 아마 작년 11월경, 시험 공부를 위해 들렀던 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죠. 2층에 있어 계단을 오르자, 은은하게 풍기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 줄여서 달수향이 저를 감쌌어요. 달수향이 진하게 코끝을 스치더니, 무조건 빵을 먹어야겠다며 제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죠.
설레는 마음으로 얼굴 없는 그녀의 문을 열자, 때아닌 크리스마스트리가 꽤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와 눈이 마주쳤답니다. '지금이 아무 의미 없는 날일지라도, 당신이 내게 오는 것만으로 그날이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가 될 테니까요'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운명이었어요.
첫인상이 중요하다더니 정말 맞는 듯해요. 방금 핑크빛 이야기를 주고받던 커플이 나간 자리에 떨어진 빵 조각들조차 카페가 선사하는 미적인 '더티 플레이팅'처럼 보였죠. 침이 고였습니다. 저는 이미 루체테 씨에게 넘어가 버렸어요.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다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죠. 하지만 루체테 씨는 비상했어요. 그래서 끌렸어요. 이미 트리가 증명하고 있듯, 가운데를 가르는 긴 담을 기준으로 에어컨은 왼쪽에, 탐날 정도로 예쁜 반달 모양 조명은 오른쪽에만 몰려 있었죠. 제가 왼쪽에 앉으면 오른쪽에만 달린 조명을 맞고 싶게, 오른쪽에 앉으면 따뜻한 난방을 온몸으로 맞고 싶은 마음에 왼쪽에 앉고 싶게 하더군요.
연애 고수였어요. 아, 맞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사귀었답니다.
따뜻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반전을 주는 소심한 해호미 씨와 달리, 단번에 감싸버리는 루체테 씨는 과감했죠. 하지만 인간은 늘 실망을 하는 존재인가 봐요. 그녀의 응원 속에 글도 쓰고 공부도 열심히 했건만, 결국 얻은 건 그 비상한 공간이 주는 무덤덤함이었어요. 익숙해져 버린 거죠.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나는 트리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죠. '도대체 언제 꺼지니? 항상 나를 반겨줄 필요는 없어. 질린다 정말. 우리 시간 좀 가지자.'
이렇게 관계는 멀어졌어요. 항상 과감했던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따뜻함을 알려준 해호미 씨는 그렇지 않더군요. 12월의 크리스마스가 아닌, 해외에서 건너온 8월 여름의 크리스마스였죠.
루체테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손님과 연애를 하겠죠. 하지만 우리 해호미 씨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사람이 많아도 저를 한 번에 삼켜버릴 듯한 집중력을 선사할 테고, 머리가 다시 터지는 경험을 하게 해줄 거라고요. 그렇게 다시 만나러 갈 거라고 전해주세요.
해호미 씨와 루체테 씨, 모두 제게 좋은 존재예요. 다만 건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길 하나 건너 있는 해호미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면 루체테 씨가 얼마나 놀랄까요.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잊듯이 카페도 카페로 잊으려고 해요. 그래도 가끔 찾아갈게요. 제가 변심했다는 걸 의심하지 않도록요.
미안해요. 루체테씨
고마워요. 해호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