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터졌다.

by 작가미상


글쓰기 좋은 환경을 위해 오래된 가구를 치우고 인테리어를 끝낸 지 2달이 지났다. 인테리어 직후엔 나무 향수를 빵빵 뿌리며 존재감을 키웠고, 주황색 전등 밑으로 들어가 글이며 공부며 나의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역시 집인지라 열정의 방향은 이내 우회전하며 그간 아껴둔 위스키 병과 미술관에서 구매한 잡지로 향했다.


집에서는 연필 잡는 과정부터가 힘들다는 친구의 말에 나의 공감 수치는 최대로 올라간 지금이다. 재택근무로 회사를 운영했다면 운영은커녕 사업자 등록에서부터 막혔을 거라 자명하다.


그렇게 영감을 뽑아 적어두던 공책과의 만남은 잠시 미뤄두고 잡지와 위스키를 앞에 데려왔다. 공책에게 거짓말하고 잡지와 위스키를 만나니 불륜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부정하지 않겠다. 그저 집에서만큼은 공책의 거칠거칠한 질감보다 위스키의 부드러운 영롱함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크리스탈 무늬가 박힌 잔에 얼음 세 개와 조니워커 블루 라벨을 일정량 부어 넣었고, 감성 있는 연갈색 의자에 앉았다. 이 의자를 말하자면, 최대한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의자를 사자는 명목으로 구매한 것이다. 다시 말해 효율성이나 내구도보다 예쁨의 척도와 방에 어느 정도 적응력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구매 요건이었다. 삐걱거리고 허리가 약간 아프다는 것 빼고는 괜찮다.


다음은 미술관에서 구매한 잡지를 펼쳐 작가이자 건축가인 이타미 준의 건축물을 보는 것이다. 건축에 대해 모르지만, 특이하게 그의 건축물 사진만 보면 무언가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녹색 섬광이 보이는 순간처럼 내 눈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위스키의 영롱함보다, 그리고 의자의 예쁨 척도보다 높고 아름답게 말이다.


이 방은 글을 짜임새 있게 연결해주는 역할보다 판단을 위한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버리는 섬광이 된 이후였다. 그것의 용도를 결정하는 주체와 방과 어울림의 정도가 가장 신중하게 작용하는 요소는 나이기에, 내가 섬광이 된 이상 내 방은 자기만의 판단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 판단한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서


더 이상 글쓰기에 좋은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지만, 다시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주 가던 카페, 루체테로 갔다. 청주 시내 지하상가 버스정류장에서 뒤로 두 블록 정도 가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자주 가던 곳이라 그곳도 나의 방과 다름없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글과 공책에 집중하기보다는 딴짓을 시작했는데, 어쩌면 좋을까. 다른 카페가 이보다 더 좋은 곳일까 고민하던 찰나, 친한 동생이 알려준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이름은 해호미. 청주대교를 지나 사직분수대 근방에 위치한 카페였다. 오픈한 지 약 두 해가 지났지만, 꽤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칸막이 없이 매우 개방적인 공간이었는데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좌석이 있었다. 바로 하나밖에 없는 1인 좌석이었다.


운이 좋게도 사람이 없어 덥석 앉았다. 고정되어 있을 것 같은 나무 의자였지만, 부드럽게 좌우로 움직였고 겉보기엔 의자와 책상의 높이가 불편할 것 같다는 판단은 이내 앉아보니 헛소리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카페, 설계부터 손님을 유혹하는 기술이 수준급이었다.


그렇게 아이패드와 읽을 책을 꺼내 작업이라 말하기 부끄러운 세미 작가지만 위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몸이 달아오르면서 7시간을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의자와 책상과의 완벽한 높이까지 나에게는 카페라는 감정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활짝 웃으면서 광기 서린 눈을 부릅뜨고 했던 터라 어깨에 담이 오고 눈은 따가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향해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완전히 글에 먹히는 기분이었다. 팔과 다리를 순서대로 먹히기보다는 통째로 삼켜졌다. 글쓰기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그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용도만을 결정했을 뿐이다. 하지만 고통과 희열을 마주한 순간, 언젠가 또 다른 공간을 찾아 헤매게 될지라도 나는 더 이상 글쓰기 좋은 장소를 찾아 다니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나만이 글에 온전히 먹힐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비로소 머리가 터진 기분이었다. 아니, 터졌다.


루체테에게는 바람이 아닌 권태기라고 하자.

언젠가 해호미가 질릴 때면 루체테가 그리워질 테니.


인간에게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하니 묘한 쾌감이 닭살로 돋아오른다.

내일 봐요, 해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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