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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Jul 27. 2022

경찰 신분증 말고 권총부터 들이대란 말인가요?

강력반 형사 2명을 살해한 이학만 / 경찰 영웅 두 분을 추모하며...

탁 타닥.. 타다닥.. 타다닥...

2004년 8월 1일 일요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밤. 서울경찰청 강력계 사건관리 실무자였던 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강력반 형사 2명이 칼에 찔려 숨진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2004년 7월 29일. 피해자 이 모 씨(35세, 여)가 다급하게 서울 서부경찰서를 찾아왔다.

이학만(35세, 택시기사)과 3개월 간 교제했는데, 그만 헤어지자고 하자 그가 느닷없이 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칼로 위협하며 상해를 가했는데, 추가 피해를 당할까 불안하다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피해자를 안심시킨 후, 검거 시기를 조율하던 심재호 형사, 이재현 형사, 정○○ 형사...

세 형사는 8월 1일 밤 피해자가 마포구 노고산동에 있는 지하 커피숍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정 형사는 커피숍 밖에, 나머지 두 형사는 손님을 가장하여 따로따로 앉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20여 분 지난 9시 20분경... 이학만이 나타났다.

피해자와 합석하는 것을 확인한 두 형사는 이학만에게 다가갔다.

심 형사는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하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이 형사는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이학만은 잠깐만요 하며 신분증을 꺼내는 척하다 소지하고 있던 사시미 칼로 심 형사의 가슴과 옆구리를 순식간에 찔렀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심 형사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건 당시 커피숍 내부 - 2004. 8. 2. SBS 뉴스 자료 화면


깜짝 놀란 이 형사는 한 손으로 심 형사를 부축하면서 반사적으로 삼단봉을 빼들어 이학만을 검거하려 했다.

이학만은 매몰차게도 이 형사까지 옆구리를 비롯해 온몸 여기저기 수차례 난도질을 하고 도망쳤다.


사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전신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텐데도 이 형사는 계단을 올라가는 이학만을 뒤쫓아가 격투하여 기어이 넘어뜨려 제압했다. 몸무림 치는 그를 위에서 짓누르며 커피숍 주인 김 모씨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범인 발을 잡아요!!!"


김 씨가 붙잡으려 다가가자 바닥에 깔린 이학만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겨누자 김 씨는 후문으로 달아나 버렸다.

어깨를 깨물리고 등에 수차례 칼날을 더 맞으면서도 혼자 외로이 이학만을 누르고 있던 이 형사. 지원 경력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국 이학만은 9차례나 칼에 찔려 힘이 빠진 이 형사를 밀쳐내고 피범벅이 된 채로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MBC, YTN 뉴스 자료화면


심장을 관통당해 쓰러졌던 심 형사는 다시 몸을 일으켜 사력을 다해 이학만을 뒤쫓았으나, 계단을 다 올라가서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고, 이학만은 길을 건너 자신이 몰고 온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이학만이 혼자 뛰쳐나오고 뒤 따라 심 형사가 흉기에 찔려 나오는 걸 본 정 형사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여 추적을 뒤로하고, 동료들을 구하여 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두 형사는 끝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 후, 경찰 2명을 살해희대의 살인범에 대해 5,000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대대적인 공개수배를 하였고, 일주일 만인 8월 8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박 모씨 주택에 숨어든 이학만은 박 씨의 신고로 출동한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자해한 채로 검거되었다.

2004. 8. 8. 이학만 검거 관련 뉴스 자료화면(YTN / 연합뉴스)



이렇듯 숭고한 두 경찰관의 희생을 두고 언론은 경찰의 총기 미소지와 안일한 대처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쏟아냈다.

충격이었다.

엄정하게 법 집행하는 공권력을 무시하고 칼을 휘둘러 경찰관을 살해한 범인을 비난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형사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한 가정의 가장인 두 형사가 칼에 찔리고 깨물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상황에서도 범인을 검거하려 했는데... 안일한 대처라는 매도가 말이 되는가 말이다.


당시는 인권보호 차원에서 총기나 장구를 사용하여 체포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같은 시기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검거할 때에도 삼단봉조차 쓰지 않았다. 수갑 외에 삼단봉을 챙겨 갔다는 것은 경찰서 강력반장 출신 내가 봐도 상당한 대비를 한 것이었다.
형사들끼리는 그러면 신분증 제시하기 전에 권총부터 들이대라는 말인가라는 자조석인 탄식도 있었다.

경찰은 ... 살인 피의자나 조직폭력배가 아닌 데다 ... 공개적 장소여서 총기 등을 휴대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4. 8. 2.)


휴일 밤임에도 오직 피해자만 생각하고 현장에 나갔던 대한민국 강력 형사... 죽음의 문턱 앞에서 남겨진 가족들 생각에 편하게 눈감지 못했을 두 형사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두 동료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피습 황을 상세히 파악하기로 했다.

이학만 추적에 바쁜 서부경찰서에 양해를 구해 피해자, 목격자들의 진술을 확보하고, 현장 사진을 종합하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정리한 글을 기자실을 통해 배포했다.

그 후부터 피습 당시 급박했던 상황이 조금씩 언론에 조명되었다.

경위 심재호, 경장 이재현 부조상


불의의 일격으로 심장이 찢기는 고통에도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 범인을 잡고 싶었을...

수차례 칼에 찔려 피를 뿜어내며 생사의 기로에 선 그 상황에서도 범인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던... 

하늘의 별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경찰 영웅 고 심재호 경위, 고 이재현 경장을 추모한다.



벌써 순직 18주년...

경찰청 순직경찰 추모관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계신 순직자 사모님의 추모글 중 하나로 마무리한다.

○○아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우리가 결혼한 지 ○번째 기념일이야.

자기가 있었다면 케이크와 꽃다발이라도 사들고 왔을 텐데
오늘은 우리 ○○이가 축하 카드를 만들어왔네.
나도 잊고 있었는데 카드를 보고 기분이 묘하더라구.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기특하고.
자기가 보낸 거라고 생각할게.

○○아빠 고마워. 요즘은 자기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
아이들 때문이겠지
보는 사람들마다 ○○이는 커가면서 더욱더 아빠랑 꼭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
걷는 모습도 그렇고 뛰는 모습도 닮았어.
정말 다행이지.

오늘은 혼자 맥주나 한잔 해야겠다.
나만의 날이니까......
또 올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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