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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Nov 23. 2024

삼규 오빠야

연재소설 : 수리공 차삼규
10. 삼규 오빠야


말갛게 단풍이 익은 가을날이었다.

정임과 은오, 진경은 우아하게 겨울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활동 준비로 분주했다. 옷에 물감이 튈까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고급 장갑도 꼈다.  


반짝이는 투명색 캔버스를 바닥에 넓게  깔았다. 붉은색 물감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노란과 연둣빛이 어우러진 그 흐느적거리는 사물에 물감칠을 했다. 한 겹 두 겹. 덧칠을 하다 보면 과하다 싶어 걷어내었다. 너무 연하면 생기가 없고 너무 진하면 답답해 보였다. 은오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다. 속상한 마음을 진경에게 토로했다. 


"난 아무래도 소질이 없나 봐."

"언니, 나도 태어날 때부터 잘하진 않았어. 하다 보니 잘하게 된 거지."

"처음이라 그렇겠지?"

"응. 오늘 여러 번 그리다 보면 늘 거야."


그렇게 붉은색 칠을 수없이 하다 보니 은오는 눈이 뻐근해왔다.

"진경아, 나 도저히 더는 안 되겠어."

"언니, 이제 그냥 관성으로 하는 거야.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해."


"나 눈이 너무 아파. 적색경보야."

"그럼 뒤에서 언니를 기다리고 있는 초록색 그들을 쳐다봐. 의지가 생길 거야."


은오는 휙 돌아보며 눈의 피로를 물리쳤다.

"헉! 저들도 날 기다리고 있어?"

그때 정임이 한마디 덧붙였다.

"바깥 수돗가에 더 있다."


은오의 한숨이 깊어졌다. 어느덧 고고한 채색작업이 행위예술로 바뀌기 시작했다. 신나는 2000년도 노동요와 함께 패대기가 시작되었다. 이리 철썩 저리 철썩.

건모 오빠의 '잘못된 만남'이 흐르자 패대기 속도는 극에 달했다.


"너 오늘 잘못 만났다."


"아우~ 어깨 아파."

"아, 허리야."


고고하던 진경의 신음 소리와 탄식도 들려왔다. 그때 정임이 하는 반가운 그 말에 은오는 손에 남은 마지막 실체를 패대기쳐버리고 식탁으로 달려갔다.


"밥 묵자. 보쌈 다 됐다."


김장김치와 곁들여 먹는 따끈한 보쌈으로 오늘의 수고는 눈 녹듯 사라졌다. 보쌈에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은오와 진경은 배부른 상태 그대로 낮잠을 잤다. 배추 도사, 무 도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쫓아오던 꿈을 꾸던 은오는 개 짖는 소리에 깼다.




"오빠야!!!!!!!!!!"


은오는 버선발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렇게 삼규가 반가운 적은 없었다. 오늘은 검은색 그랜저를 타고 왔다. 봉고도 트럭도 아닌 승용차라는 것은 일하러 온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편하게 놀러 왔다는 신호였다. 


"엄마, 상구 오빠야 왔다."

"야가 와 이리 호들갑이고. 지난주에도 봐놓고."


은오가 삼규를 이리 기다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튜브를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속에 들어가서 먹고사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모습을 보는 데 문득 그가 떠올랐다.


'못하는 게 없는 양손잡이 맥가이버'

'시커먼 얼굴 뒤에 감춰진 다정한 훈남캐'

'소설 속 캐릭터 같은 동네 아저씨.'


정글의 법도 '김*만', 나는 자연 놈이다 '*택' 등 다양한 인물들이 떠올랐고 삼규가 그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마침 찾아온 삼규는 구세주 같았다.


"오빠야, 오빠야. 일단 여기 서 봐라. 사진 한 번 찍어보자."

"와? 갑자기."

"자세한 건 차차 알려줄 테니 일단 찍어나 보자."


은오는 삼규를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랜저 옆에 세워 사진을 찍었다.

역시 훈남이었다.


_시커멓게 그을린 얼굴

_깊게 파인 하회탈 주름

_반은 희고 반은 검은 머리칼

_때가 묻어도 티도 안 나는 쥐색 체크무늬 셔츠

_늘 걷어올려진 소매


'언제 이리 나이 든거요?'


삼규는 차 뒷좌석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참치회, 굴, 가리비, 삼겹살, 겨울용 긴 목양말 20켤레가 담겨 있었다. 막걸리 5병과 함께...


'아, 오늘도 죽었다. 막걸리 5병!'




삼규는 오랜 수리 생활로 끼어버린 손톱 때가 있는 솥뚜껑 같은 손을 깨끗이 씻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본인이 사 온 회랑 먹거리를 식탁에 세팅했다. 막걸리를 꺼내고 하씨의 최애템 진로 슈거제로 소주도 꺼냈다. 진경은 막 담근 겉절이와 맥주를 내어 놓았다. 은오와 은오 부모님 하씨와 노씨, 삼규의 사촌동생 진경, 그리고 삼규가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삼규가 사 온 참치 한 점을 입에 넣으시던 절대미각 하씨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참치회는 빨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기라."

삼규가 어른들 드시기 좋은 살살 녹는 회를 사 왔다는 얘기다.


삼규는 또 은오와 진경에게 굴접시를 밀어주며 말했다.

"굴 마이 무라. 에센스 4~5만 원짜리 발라봐야 소용없다. 겨울엔 굴을 2~3일에 1 봉지씩 먹어주는 게 좋다. 봄에는 멍게 먹고."

"맞나?"

"에센스보다 낫다. 굴 먹으면 다음날 피부가 땡땡해진다."

"그러게, 에센스 처발라봐야 그때뿐이지."


삼규가 상추에 회를 넣고 쌈을 만들어 은오 엄마 씨 입 앞으로 가져갔다.

"가마이끄라보자."


안주를 준비하느라 바쁜 정임이 쌈을 좀 있다가 먹으려 했지만 삼규는 입에 넣어주었다. 은오도 해본 적 없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을 삼규가 했다. 표현 서툰 경상도 노부부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은오는 필시 그가 그들의 숨겨진 자식일 거란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근데, 오빠야!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뭐가?"


"우리 엄마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긴... 몰라서 묻나?"


"알기야 알지."

"근데 왜 묻노?"


"우리 집에 왜 이렇게 잘하나 싶어서. 혹시 정임 씨 숨겨 놓은 아들이가?"

은오가 돌직구를 날렸다.


"궁금하나?"

"응. 무지."


"느그 엄마가 어릴 적에 내 키웠다 아이가."

"내 이랄 줄 알았다."




삼규가 막걸리에 잔을 채웠다. 멋쩍게 웃으며 또 이야기보따리를 풀 태세였다.


“이모가 다 키우기 힘드니까 나를 외할아버지 댁에 맡겼거든. 그래서 나는 외갓집에서 느그 엄마랑 같이 컸다."


그랬다. 삼규 어머니는 은오의 이모였다. 은오 엄마는 정임, 삼규 엄마는 정남이었다. 12살 차이 나는 자매관계였다. 은오와 삼규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진 삼규를 당시 아가씨였던 정임이 많이 챙겨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 키워준 은혜, 양육비가 이리 질긴 인연이 될지 삼규와 정임도 당시엔 몰랐을 것이다.


6살부터 학교 가기 전까지 이모와 함께 시골 외가에 살았던 삼규는 누구보다 풀내 나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다닐 무렵 삼규는 부산으로 돌아갔지만, 결혼한 정임이 부산에서 살게 되면서 노정임, 하우곤, 차삼규 셋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삼규는 이모부이자 은오 부친  신문보급소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세월이 흘러 은오가 태어났고 은오의 친구, 그들의 부모님까지 인맥을 넓혀갔다. 하씨와 노씨의 자영업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은오의 육아일지를 머릿속에 담고있는 남자였다. 은오가 길을 잃어 파출소에 간 사건, 은오가 경기를 한 것, 은오 친구 이름에 친구 부모님 직업까지 연도별로 기억했다. 이 세심한 남자는 오늘도 막걸리를 마셨다. 할 말도 아는 것도 많다.


수리공을 하면 하루에 최소 2~3집을 방문한다고 했다. 거기서 알게 되는 빅데이터를 풀어놓으면 최소 7시간이다. 은오와 진경은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어디 하나 버릴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정임은 삼규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에 말한다.


"막걸리 병 치아라."


말하기 좋아하는 정임도 이미 지쳤다.


"벌써 7시간째 토크야."

"나(나이)가 다 얼마고, 고만 묵어라."


삼규가 돌아왔다.

"삼규야, 배즙 달여놨다. 내일 집에 갈 때 가져가래이. 안 아픈  버는 기다."

"맞다. 이모야.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이기는 삶인기라."


은오는 둘이 저리 챙기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삼규가 허리 아프다고 보약을 알아보는 엄마, 이모가 해주는 까지매기 조림이 먹고 싶어서 왔다는 삼규, 삼규가 사 온 양말에 흐뭇해하는 아버지의 우정이 계속되기를.




숙취에도 일찍 일어난 삼규거들 일이 없나 살피고 있었다. 은오도 오늘은 일찍 일어나 유튜브 함께 찍자는 얘기를 삼규에게 꺼낼 참이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차 사장님 인맥에 내 실력이면(탁자 쾅) 이거 완전 살아있는데.


우리가 이래 만난 것도 쉽지 않다 그지예. 이 앞에 조용한데 가가 우리 둘이 커피 한 잔 하입시더."
                                                                                 - 영화 '범죄와의 전쟁' 대사 인용 변형-


* 백수광부의 100번째 글이자, 소설 '수리공 차삼규'의 10화이자 마지막 회입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이 소설에 영감을 준 이종사촌 오빠인 '최사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책으로 만들어 내년 오빠야 회갑선물로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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