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그네틱의 방향도 모르던 머리 검은 짐승은 편의점을 떠나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 두 번째 알바,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 위치한, 호텔 베이커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나는 3년 간 일을 한다.
편의점에서 카드 결제 포스의 이치를 깨달은 나는 이곳에서 결제왕으로 통했다.
빵 포장은 누구보다 빨랐고, 영수증 재발급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벨업 한 나를 기다린 건 평화가 아니었다. 내 알바 인생 최고의 고객님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바야흐로 '고객 올림픽'의 개막이었다.
금메달 : 폐기 빵 도둑
베이커리의 폐점은 밤 10시였고 9시 50분이 되면 마감을 하였다.
남은 빵들은 초반에는 업체에 기부를 하였지만 위생 문제로 전량 폐기가 원칙이 되었다.
맛있는 빵들이 패대기 쳐지는 건 아깝지만 나는 정해진 룰에 따라 일해야 하는 일개 알바생이었다.
문제는 정확히 9시 50분에 나타나는 손님들이었다.
항상 같은 시각,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빵들을 본인들이게 버려달라고 했고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으면 음식 아깝다는 말로 핀잔을 주곤 했다.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하루는 거절하는 내게 아주머니가 역정을 내시더니, 포장된 빵을 낚아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카운터를 뛰쳐나와 그 뒤를 쫓았다.
다행히 20살인 내가 더 빨랐다.
백화점 식품관 한복판에서 벌어진 추격전 끝에 빵 봉투를 되찾아왔다.
창피했는지 빵 도둑 아주머니는 그 이후로 오지 않으셨다.
항상 달리기는 꼴찌를 도맡던 내가 유일하게 역전한 일이기에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좀 자랑스럽다.
은메달 : 살기의 정신 지도사
백화점 주차장은 최초 1시간은 무료, 이후는 영수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금액에 상관없이 통과시켜줬는데 문제는 우리 가게가 주차장 바로 옆이라는 사실.
이 지리적 조건은 새로운 유형의 고객님들을 탄생시켰다.
구매도 안 하고 영수증만 달라는 분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결제왕답게 실제 구매 고객의 영수증은 카드 번호나 시간으로 찾아내 드렸지만, 없는 영수증을 만들어낼 방법은 없었다.
나도 원칙대로만 하지는 않기에 정중하게 요청하시면 남는 영수증을 드리긴 하였지만 무턱대고 달라고 하시면 오기가 생겨 거절하였다.
그날은 유독 취기가 가득한 손님이 주차용 영수증을 요청하셨다.
애초에 음주이고 무례하였기에 거절하자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신 차리게 한 대만 맞자
그리고는 손바닥을 들고 나를 향해 카운터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옆에 서있던 마트 경비 분들이 달려와 말려주셨다.
그렇게 나의 정신 차릴 기회는 사라졌다.
빵 영수증에 나에게 그런 살기를 드러낸 건 처음이라 등골이 오싹했다.
동메달: 양심 환불러
"맛이 별로네. 환불해 주세요."
물론 빵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환불을 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 90%는 이미 먹어서 없거나 내용물을 싹 파먹고 빵 껍데기만 덜렁 들고 온다.
더 슬픈 건, 그래도 환불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더더욱 슬픈 건, '맛없다'던 그분이 또 오셔서 그 빵을 사 간다는 것이다.
거절하면 내가 아닌 다른 알바생에게 다시 환불을 요청할 때도 있었다.
그분들의 얼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환불받으러 가기 싫으니 돈을 들고 찾아오라던 손님이었다.
겉이 딱딱해서 못 먹겠으니 환불해 달라는 고객님이셨다.
점장님이 가셨고 손님이 요구한 건 무릎 꿇기였다고 한다.
물론 빵은 속은 다 먹고 겉 테두리만 남아 있는 상태.
고객님의 컴플레인은 승진이 달린 점장님에게 중요하였고 점장님은 상품권과 빵을 가득 제공함으로써 용서받으셨다.
사회인은 슬픈 일도 많다는 걸 점장님을 보며 많이 배웠다.
특별상: 생필품 도둑
베이커리에는 정말 도둑이 많았다.
커피도 판매하였는데 커피를 나눠 드리면 그 컵에 더 드리면, 그 컵은 절반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본 흰색 머그컵인데 그게 왜 탐나셨을까.
빵끈, 냅킨, 설탕을 한 움큼씩 챙겨가는 건 애교 수준이다.
비닐봉지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뽑아 가고, 빵 밑에 까는 유산지를 뭉텅이로 가져가고, 심지어 설탕 시럽 통이나 빵 이름표까지 훔쳐 가는 분도 있었다.
"손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다들 잘못한 건 아시는지 슬그머니 물건을 내려놓는다.
대한민국엔 생각보다 도둑이 많다는 걸, 나는 빵을 팔며 깨달았다.
이렇게 호텔 베이커리는 내게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가르쳐 준 인생 학교였다.
그리고 이 올림픽의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첫 짝사랑과 첫 고백, 첫사랑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