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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 Feb 11. 2022

구력과 실력은 비례할까

0. 구력과 NTRP


나는 6개월 동안 사기꾼이었다. 경력이나 학력 위조 대신 코트에서 구력을 속였다. 평소 하얀 거짓말조차도 탐탁지 않아했지만 이런 까닭은 단 하나. 테니스를 치기 위해서다. 테니스 동호인들의 구인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네이버 카페 ‘테니스 친구 찾기’의 모집글에선 대개 ‘게임이 원활한 분’이나 최소 구력 1년인 사람만 찾던 터라 당시 6개월 차였던 나에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구력 뻥튀기로 주중이나 주말에 시간이 나는 대로 여러 사람과 공을 치러 다녔다. 바야흐로 테친놈(테니스에 미친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가 1년 차인 줄 알던 사람들에게 더러 “구력에 비해 잘 친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사기극(?)이 탄로 나진 않았다.     


나중엔 내뽕에 취해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사실 제 구력은...”이라며 사실을 밝힌 뒤 답정너처럼(답은 정해져 있어 넌 대답만 해) “어머 구력에 비해 잘 치시네요”란 말을 기다리기도 했다. 2년 차가 된 지금은 가소롭게 그지없는 행동이었으나(더 선배님들에겐 지금도..) 성취감 얻기 힘든 세상에서 뭔가 같은 기간 동안 더 괜찮은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이라는 게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6개월 간 테니스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워낙 어릴 때고 스트로크만 주야장천 치다 끝났기에 대외적으로 구력에선 제외하고 말하지만 몸에는 어딘가 모르게 그 감각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학창 시절부터 탁구, 스케이트,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의 레슨을 받았고 운동신경도 있었던 터라 6개월 만에 복식 게임을 하고 나 같은 테린이(테니스+어린이의 합성어)를 받아주는 마음씨 좋은 클럽에도 가입했다.

 

테니스에선 스텝이 중요한데, 나도 모르게 공을 치면서 구질에 적합한 스텝을 밟는다거나 초보지만 공을 때려칠 줄 안다는 것 등이 조기교육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배구나 복싱을 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럼 나는 넉살 좋게 “공은 패지만 사람은 못 팬다”라고 했다. 일찍 배울수록 생각하기 전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아 이래서 조기교육, 조기교육 하는구나’를 느꼈다.   



"구력이 어떻게 되세요?"


테니스를 치면서 가장 많이 묻고 답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구력으로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으나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 해당 간극으로 분위기가 간혹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구력에 기대해볼 만한 퍼포먼스가 나오지 못했을 때다. 구력보다 실력이 월등하면 대개 무방하나 구력이 실력보다 월등하면 난감하다. 상대나 나나 세월이 무색하게 왜 이것밖에 못 치나란 생각이 들어서다.      


구력의 사전적 의미는 공을 다룬 경력인데, 이 경력을 어떻게 산정할지가 또 애매하다. 일, 출산 등 여러 가지 개인적 이유로 운동을 중간에 쉬게 되면 이 기간을 포함할지 말지는 주관적인 판단과 선택이다. 테린이 대회에선 출전 조건에 구력이 포함되고 승부의 당락을 결정짓는지라 대개 줄이는 일도 빈번하다.    

  

이 때문에 나온 게 NTRP인데, 미국에서 개인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만든 기준이다. 1.0~7.0 등급으로 구분하며, 2,0 등급부터는 서브, 스트록, 발리 등 테니스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세분화해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주관적이라 나와 상대의 평가가 다를 수 있다.      


본인은 상당히 잘 친다고 생각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잘 치지만 실력에 비해 평가가 겸손할 수 있다. 초고수는 앞구르기 하면서 쳐도 잘 치겠지만 나 같은 테린이는 같이 치는 사람과 상황,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아 편차가 심하다. 멘탈이 개복치 일 때는 하이킥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경기력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일희일비하다가 상대편에 탈탈 털리는 날도 부지기수다.   


  

테니스는 상대적인 운동이라 상대가 잘 치면 나도 덩달아 잘 치게 되고 못 치면 같이 난타 치다가 나락으로 가기도 한다. 여력이 되면 고수의 공을 많이 받아보면 좋겠으나, 잘 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호의로 시작했으나 재능 기부 내지는 자원봉사가 되기 십상이라 마음씨가 보살인 사람의 은덕을 자주 입기 쉽지 않다.    

  

코트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아량이 넓은 사람은 기회가 되면 같이 쳐주고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지만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도 1년 차를 갓 넘기며 한창 어깨 뽕에 취해 있을 시절엔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왕초보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릇이 옹졸한 터라 물론 지금도 공 주우러 다니는 시간이 많은 초보와의 랠리보다 잘 치는 사람과 더 치고 싶다.     


게임이 재밌으려면 우선 랠리가 어느 정도 돼야 하고, 랠리가 되기까지 기간은 개인차가 있다. 매일 친 1년과 시간 될 때 친 1년은 다를 것이며, 운동신경에 따라 발달 속도도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같은 초보끼리 치면 마음도 편하고 부담도 적지만 실력이 도긴개긴이라 발전 속도가 더디다. 이 때문에 한 지인은 고수와 치기 위해 일부러 날이 추워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 테니스 비수기인 겨울에 테니스장에 가서 벌벌 떨면서 기다리다 그분들의 동정을 사 한 게임씩 치는 은혜를 입곤 했다.


테니스는 야외 운동이기에 혹한기와 혹서기를 이겨내야 진정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폭염으로 몸에서 육수가 좔좔 흘러도, 한파로 턱이 덜덜 떨려도 일단 코트에 나가면 그렇게 재밌을 수 없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은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분명 장기 곡선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오늘도 자문해본다. 나는 테니스계에서 나잇값 아니 구력값(?)을 하는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간은 절대 허투루 흐르지 않는다는 거다. 구력이 늘면 데이터베이스가 늘어난다. 여러 상황에 자주 맞닥뜨리면서 예전에는 날아오는 공을 치기에 급급했다면 갈수록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빈 곳을 보고 어디로 칠지 생각한다.


코트에서의 위치 선정도 신경 쓰게 되고, 파트너의 위치에 따른 커버 범위까지 눈에 들어온다. 계속 치다 보면 자기가 어떤 공이나 상황에 약하고 강한지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나이처럼 구력을 허투루 먹지 않으려면 생각을 하면서 쳐야 한다.   


멘털이 여러 번 털리다 보면 감정에 매몰되기보다 언제 흔들리는지, 왜 흔들리는지도 조금은 자기 객관화가 된다. 다양한 상황과 사례를 통해 수집한 데이터베이스로 대응력을 높여가는 게 구력 아닐까. 개발자들이 버그 수정을 통해 안정화 버전을 내놓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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