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어다>. 리사룬드마르크.2019
우리에게는 누구나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만의 어린 시절이 있다. 여기서 그 어린 시절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일 수도, 혹은 어떻게든 기억에서 떨쳐내고 싶은 아픈 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혹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그 시간에 존재했던 어린 시절의 '나'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그 시절의 나를 어떠한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을까.
여기, 자신을 상어라 생각하는 아홉 살 먹은 소녀가 한 명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옌니. 옌니는 학교에서 별다른 개성 없이 남들과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들을 문어라 생각한다. 반면 옌니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좋아하며 아는 것이 많아도 그것을 겉으로 뽐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주변 모든 것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난 자신을 바다 깊은 곳을 유영하는 상어와 같다고 여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옌니는 학교에서 '별난'아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아이. 선생님은 이런 옌니가 다른 문어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해."
선생님이 말한다.
"그건 살면서 무척 중요한 일이란다."
"대신 사람들이 귀를 더 잘 기울일 수는 없을까요?"
나는 말한다.
"뭐?"
"저는 문어가 아닌데요." (중략)
문어들은 온종일 보인다. 교실에서. 아주 많이.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사람을 문어라고 해서는 분명히 안 될 것이다. 사실이긴 해도.
"선생님은 옌니가 다음 주까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으면 해. 자신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담을 하면서 어머니와 같이 그렇게 하기로 하는 거야. 알겠니? 그러자꾸나."
<나는 상어다> 中
여기서 보이는 선생님의 불안함은 실은 우리 안의 불안함과도 같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남들과 '다름'에서 오는 불안함은 그것이 남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설 수도 있다는 불안함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아니 일상적인 삶이란 남들 가운데에 유별나지 않게, 자신을 그 안에 적절히 조화시켜 그 무리의 하나로 보이게끔 하는데에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상'을 꿈꾸기보다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인생의 숙명적 과제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건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더 해만 가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엔 옌니와 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나 역시 9~10살 그맘때쯤 '상어'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을 해초 정도라 여기며 유년시절을 보내왔던 것 같다. 아이 답지 않은 생각과 말투, 정적인 행동방식 등은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내가 바닷속 동물이라기보다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해초와도 같다고 여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상어인지, 돌고래인지, 혹은 피라미인지에 대해서 세상은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세상이란 공간은 우리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저 그런 문어들로 자라나 세상이 정해 놓은 엄정한 규칙과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 문어들 가운데에서도 몇몇의 앞서가는 문어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사회가 원하는 이상에 맞게 좀 더 그럴싸해 보이는 문어로 좀 더 앞서 나갔을 뿐, 결국 그들 역시 문어가 걸어가는 길을 똑같이 걸어갔다는 점에서는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때의 그들이 궁금하다. 아마도 자기가 문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그때의 그 잘난 문어들은 지금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 나이로 10살밖에 먹지 않은 옌니라는 이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어른스러우면서도 철학적이라는 데에 있다.
특히 옌니가 자신이 여느 아이들처럼 활발하거나 사교적이지 못한 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걱정을 하는 엄마를 두고 '상어 공포증'을 지녔다고 표현하는 부분은 옌니가 얼마나 담대하고 의젓한 아이인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딸내미, 정말로 혼자서 여기 있을 거니?"
"책 읽어요."
내가 대답한다.
"우리랑 이야기하지 않을래?"
"책 읽을 거예요."
"그럼 잠시 아미나 집에 가서 놀고 있을래? 엄마가 하산 아저씨에게 전화해 줄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수십 번도 아니라고 말했다. 엄마는 문간에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본다. 엄마 이마에 주름이 진다. 아주 많이 걱정하는 것이다. 공포에 가까운 표저이다. 상어 공포증.
<나는 상어다> 中
옌니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상어 공포증'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와 함께 나가 놀지 않고 그렇다고 남들과 활발하게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도 않는 아이가 불편하고 걱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옌니 엄마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문어처럼 자라나는 것이 평범한 것이고, 곧 평범한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공식 속에 갇혀 지내왔다. 우리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부모 역시 그런 가르침을 준 사회로부터 길러졌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옌니의 엄마 역시 그런 우리의 평범한 부모들 중 하나이다. 그러니 우리의 특별한 옌니의 눈에는 그런 엄마가 그저 '상어 공포증'을 지닌 안쓰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옌니는 알고 있다. 실은 문어 인척 살고 있는 엄마 안에 또 다른 상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 테면 학교 행사 모임에서 다들 체면을 차리느라 제대로 손도 못 대는 다과에 과감하게 자신의 할당량을 쟁취해낼 줄 아는 엄마의 모습에서 옌니는 엄마 안에 숨어 있는 상어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 상어 엄마 아래서 상어 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을. 정작 옌니의 엄마만 옌니가 상어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만 모를 뿐 실은 옌니는 누구보다도 상어가 되기에 적합한 자격을 지닌 남다른 아이였다. 그러하기에 옌니는 오히려 엄마를 위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어느덧 우리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실은 우리 안에 문어가 아닌 다른 그 무언가가 있음에 두려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자고 말이다. 상어면 어떻고, 놀래미면 어떠냐고 말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옌니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옌니의 이러한 비범함은 학교 소풍장소인 수족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공공연히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때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옌니가 실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과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야기는 우리에게 옌니의 친구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마무리되지만 과연 선생님의 반응이 어떨지는 열린 결말로 처리한 채 그 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응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옌니야, 네가 언제, 어디서든 당당한 상어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
옌니는 지금도 바닷속 깊은 곳 어딘가를 늘 그렇듯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을 것이다. 문어가 아니고, 바다 밖으로 굳이 나올 수 없다 해도 뭐 어떠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유영하는 상어의 기백이 이리도 눈부신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