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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더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규씨는 오늘도 리어카에 물건을 가득 실은 채 길을 나선다.


끙.

차.


힘들지만,

힘들지 않다.

이것이 내 삶이니까.


하루는 이 집에서,

하루는 저 집에서,

나를 규씨라 부르며 손짓하는 이들의 손안에 원하는 물건을 쥐어주는,


나는 만물장사다.


"잘 다녀오세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 준 고마운 아내가 아침밥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한다.


그거면 되었다.


좁은 길도 있고,

넓은 길도 있고,

차들이 가까이 붙을 때는

조금 위험하기도 한,


울퉁불퉁한 길을 걷고 또 걷고, 또 걷는다.


-하루만 더.


내게 주어진 날 보다 하루만 더.

조금씩 몸이 예전 같이 않음을 느끼며 무릎과 허리에 붙여놓은 파스를 확인한다.


-잘 붙어있어라.


멀지 않은 곳에 첫째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착한 첫째 딸.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해라."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묵묵히 뒤에서 걸음을 옮긴다.


거면 되었다.


이씨 아저씨네로 한 번 들러볼까.

거동이 불편한 김씨 할머니네를 먼저 들러볼까.

어차피 순서는 크게 상관없다.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간다.


해가 중천까지 뜨자 도로 건너편에서 오락실을 향해 달려가는 막내아들이 보인다.


"벌써 막내 학교 근처까지 왔구나."


어디서 얻은 딱지 인지 큰 딱지 하나를 손에 들고 달려가는 걸음이 반갑다.


씨익 웃음이 나온다.


그거면 되었다.


다시 내게 맡겨지는 짐들도 있다.

그래서 나의 리어카는 늘기도 줄기도, 무거워지기도 다시 가벼워지기도 한다.


매일이 다르지만,

매일이 같다.


리어카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나의 또다른 이름.


끙.

차.


이번엔 오르막길을 올라본다.


"너도 오래됐지? 조금만 힘을 내자아"


살살 달래 가며 리어카를 쥔 손에 힘을 준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어둑하니 어스름이 질 때 즈음,

어느순간 리어카를 미는 일이 조금은 쉬어진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꼬맹이 둘째 딸이 리어카를 밀어주고 있다.

고개는 푹 숙인 채.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조금 더 힘을 싣기 위함 임을 나는 안다.


너는 언제나 아빠가 최고라고 말해주는 딸이니까.


그거면 되었다.


오늘 들러야 할 곳이 얼마나 남아있나.

조금씩 굽어가는 등을 다시 한번 일으켜 본다.


아,

벌써 길이 끝나있다.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데.


"우에엥"


우렁찬 갓난아이 목소리가 난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갓난쟁이가 리어카 안에서 울고 있다.


아니,

내 손주 녀석인가?


바지춤에 손을 닦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손가락을 잡아본다.


울음을 뚝 그치고 나를 보는 아이의 눈빛이 내 아들 어릴때의 그것과 똑 닮아있다.


"아빠, 고생많았어요."


리어카를 밀던 딸아이가 말한다.

그녀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있다.


"..."


나도 모르게 리어카를 쥔 손을 툭 놓친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리어카는 쉽게 떨구어진다.


빛이 쏟아진다.


그 끝에서,

늘 내가 마음에 품었던 말이 내게로 전해져 온다.


'그거면 되었어요."


"아니, 하루만, 더..."


감사합니다.

낳아주셔서.

사랑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빠의 인생을

존경합니다.


"아이고, 울지 마라. 요놈 자식아."


간신히 목구멍 속에서 한마디를 뱉어낸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길을 오른다.

.

.

삐이이이이이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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