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소설
삐삐
삐삐삐-
기숙사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별 스티커를 세던 우리가 손을 뒤로 뻗어 삐삐를 집는다.
-엄마네.
"엄마"
"응. 저기.. 막내삼촌 댁으로 짐 부쳤다며?"
여름방학동안 하기로 한 아르바이트가 삼촌 집 근처라 한 달만 신세를 져도 되는지 미리 양해를 구했었다.
"응, 삼촌이 그래도 된댔는데?"
"어어. 삼촌이 숙모한테 미리 말을 안 해놨나 봐. 그래서. 저기 다른 데 친구 집 없어?"
"친구?... 없는데."
자주 뵈지는 못해도, 갈 때마다 '어서 와'라고는 해주셨었는데.
아이들 공부 안 한다고 버럭 소리 지르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던 숙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할머니한테 물어봐주면 안 돼? 같은 동네잖아..."
"할머니, 집도 좁아서. 알았어, 엄마가 물어보고 알려줄게."
기숙사 공중전화 앞에서.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서 있는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방 네 개짜리의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부엌하나 방하나의 한 동 짜리 아파트로 박스가 옮겨간다.
할머니의 방
성인 두 명이 누우면 방은 가득 찬다.
방 안을 두르고 있는 자개 농이 아니더라도.
상이 들어올 때 이불을 반으로 접으면 방의 반이 찬다.
잠들기 전에 이불을 펴면 방은 다시 가득 찬다.
머리맡에는 한 손으로도 번쩍 들 만큼 조그만 티브이가 꺼지지 않는다.
그래도 안 나오는 채널 없이 삼사방송이 모두 나와 적막을 없애준다.
비워진 방이 아니라,
아늑한 방이다.
"할머니,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어딜 그렇게 가요? 곱게 입고?"
저녁 아르바이트라 새벽에나 들어오는 우리는 바통터치 하듯 아침을 채려 놓고 나가는 할머니에게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누구에게나 사생활은 묻지 않는다. 가 원칙인데.
"먼 그런 것을 궁금해한다냐. 어여 밥이나 먹어."
할머니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가방을 집어든다.
"말 안 해주면 쫓아가려고."
밥 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들며 대꾸한다.
"어구, 어딜 쫓아와. 잠도 모자란 것이. 내가 없어야 글도 네가 편한께. 기냥 편하게 쉬고 있어어. 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편하게 있어.
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할머니는 새벽마다 나가서 우리가 출근 전까지는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아마 교회에 가 계실 거야. 할머니랑 계속 같이 있으면 너 불편할까 봐.'
할머니 남자친구 생긴 거 아니냐며 전화하던 내게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걸 듣고서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를 거부하는 어른의 마음은 서운하지만 이해한다 하면 끝이다.
나를 배려하는 어른의 마음은. 이해하는 걸로 끝이 나도 되는 걸까.
나는.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아침을 치우고 김치를 냉장고에 집어넣는데 오늘도 소주 두 병이 놓여있다.
어느 날은 한 병. 어느 날은 두 병.
-언제 소주는 드시는 거지.
조금 맛이라도 볼까, 소주잔을 꺼내 한 잔 쪼르르 따라본다.
엄마가 알면 등짝 스매싱이다.
할머니의 시
오늘은 기어코 답을 들어야겠다.
'죄송합니다. 몸이 아파 오늘 하루 쉬어도 될까요.'
출근 첫날부터 술 제대로 먹는 법을 가르쳐준다며 맥주잔 반이 가득 차게 소주를 따라 내밀던 세상 쿨한 사장님은 오늘도 오케이다.
'평소에 열심히 하니까 봐주는 거야.'
한마디를 남기시고.
찰칵찰칵.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우리는 쭈그려 있던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간다.
"할머니!"
"오메, 깜짝아. 안 나가고 있었어어?"
"네. 오늘은 할머니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요리를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갈비찜과 잡채를 했는데.
갈비찜과 잡채 인지 모르실 것 같다.
"이게 다 모다냐"
역시.
모른다.
저녁상을 치우고 할머니 무릎에 무거운 솜이불을 덮어드리며 묻는다.
"할머니, 진짜 매일 어디 가는 거야? 왜 가는 거야?"
"남사시롭코로 왜 자꾸 묻는다냐 너는."
"내가 남자야? 남사시럽 긴 무슨. 말 안 하면 해줄 때까지 나 일하러 안 갈 건데."
잘 익은 고구마 하나를 까서 우리 손에 쥐어준다.
"실은 내가. 하이고.. 히히히. 이 나이에 뭐 배운다고 뭔 센터라는 것을 간다네."
"문화센터?"
"어어. 거기가믄 나 같은 할매들 할배들 모여서 글공부도 하고 시도 쓰고 그랴."
"시이? 시이이?"
"그니까는 말여. 얼른 자 아가 너는."
"스무 살 아가도 봤어? 아직 일곱 시도 안 됐어. 나도 좀 보여주면 안 돼 할머니?"
하루 종일 틀어져 있는 티비엔 잘생긴 아나운서가 나와서 우리나라에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뉴스를 읽는다.
"그런 거 없어야."
으응. 하며 우리는 할머니가 들고 다니는 손수 만들었을 손가방에 손을 쑤욱 집어넣는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런다냐."
할머니는 이미 말리기엔 늦은 걸 아시는지 고구마를 베어 물여 스르르 웃으신다.
노트 한 권을 펼친다.
"세상에. 이게 다 할머니가 쓴 거야?"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않고 잘생긴 아나운서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아이고, 저거 저거 어쩐다냐."
우리는 가장 최근에 씌어진 시 하나를 소리 내어 읽는다.
제목: 술 한잔 따라.
엉덩이를 들고
조금 더 기울이면
한발 더 다가가서
닿은 적 없는 내 숨결을 허락할터니,
이 아픔 가져가주라.
삶은 이별이랑 닮아서
이별은 삶이랑 닮아서
앞으로 밀어내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라 하는데.
투명한 몸에 온전히 시선을 누이고
시간의 투정까지 내가 다 받아낼터니,
그러니 가져가주라.
내 심장을 남김없이 녹여내는
뜨거운 불길 사이로 흘러들어
그렇게 가져가주라.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가져가 주라
우리는 노트를 덮고 할머니를 쳐다본다.
할머니의 주름 진 얼굴이 까맣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붉은 것도 같고, 무슨 색일까.
"할머니, 누가 그렇게 그리워? 이거 정말 할머니가 쓴 거야?"
"아니 그럼 내가 쓰지 옆자리 할방구가 썼을까."
"크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보고파서 쓴 거야?"
"아니여"
고구마 껍질을 바구니에 툭 버리며 답한다.
"에에, 그럼 누구래? 누가 그렇게 그리워 할매 숨결도 허락한대?"
"아빠여. 나도 아빠가 보고잡아서. 그래서 쓴겨."
할머니는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아나운서와 대화하듯 답한다.
"..."
"할매도 아빠가 있었다잉. 신기허제? 허허허"
우리는 눈가를 닦는 대신 입술을 삐죽인다.
우리나라에 정말 심각한 일들이 저리 많은가.
뉴스 속에 리포터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진지하다.
겨울이다.
봄이 오면 신나는 뉴스들이 더 많이 나올까.
그런데.
할머니의 이름은 뭐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