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을 틀었다. 물줄기가 심상치 않아서 관리실에 전화를 하니 물탱크 청소를 하는 날이라고 했다. 공고는 보지 못했고 따로 물을 받아두지도 않았다. 다행히 더운물은 좀 나와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집 주변에 있는 세 개의 도서관 중 가장 큰 곳으로 향했다. 다른 한 곳은 휴관일이었고 나머지는 어린이 도서관이어서 성인을 위한 책이 적었다. 차도와 인도 사이의 턱에 낙엽이 많이 쌓여 있었다. 길에 떨어져 반쯤 부스러진 낙엽을 밟으면 조금 미끄러웠다.
도서관은 내부 공사 중이었다. 열람실은 1층 한곳만 열려 있었다. 각종 월간지가 있는 공간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책상을 가득 들여놓고 아크릴 판을 세워놓았다.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 시간쯤 문학동네와 창비, 리터 등을 훑어보았다. 칸막이가 있었지만 투명이었고, 넓지 않은 책상에 대각선으로 마주 앉아 있으니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도서관을 나와 근처 카페로 갔다. 카페 안은 한산했다. 밀크티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 넣어온 얇은 책을 꺼내 읽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도서관 보다 카페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와 백색소음이 긴장을 좀 풀어주어서 상상이나 생각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한자리 건너에 두 사람이 와 앉았다. 얼핏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00한테도 딱 부러지게 얘기하고. 길게 말 섞지 마…….”
간간이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인 듯한 여자는 목소리가 좋았고, 말투도 명쾌했다. 다른 여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책 속의 이야기로 끌려들어 갔다가 불쑥 맥락 없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다지 귀 기울이지도 않았고 중요한 말은 소리를 낮춰서 무슨 얘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어머, 죄송해요.”
옆자리에서 충고를 듣던 여자가 전화를 받으며 지나가다가 외투 위에 올려둔 내 스카프를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내가 말하며 그녀가 주워준 스카프를 살짝 털어 목에 둘렀다. 환기를 위해 카페의 문을 열어두어서 조금 썰렁하던 참이었다.
나는 만 19년간 홀시어미와 살았다. 무녀 독남인 남편은 효자였다. 그렇게 사는 일로 친구나 선배들에게 하소연을 하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충고가 돌아왔다. 듣는 자리에서는 나도 그렇게 해야지 결심을 하곤 했지만 결국은 못했다. 논리적으로는 그래야 내 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내 성격도 한몫했고, 남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난날은 후회투성이여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지금은 그런 사람이 드물겠지만) 충고를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삶을 사는 거지. 어떻게 다 명료하게 살아. 애를 쓸 뿐 석연한 건 없어…….
창밖을 보며 남몰래 항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작은 바람에도 낙엽이 휘날리는 길을 걸으며 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단수는 끝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