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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by 김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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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십 년도 더 된 스피디백을 꺼내보았다. 많이 들지 않아서 가방은 멀쩡했지만 지퍼 끝에 달린 자물쇠가 검은색이 되어있었다. 열쇠는 당연히 어디 있는지 모른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닦아보았지만 세월의 더께를 벗겨낼 수 없었다.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발견한 연마제를 주문했다.


비닐장갑을 끼고 천에 연마제를 묻혀 닦았다. 효과는 훌륭했다. 아주 반짝반짝해졌다. 내친김에 거뭇거뭇 해진 은이나 브론즈 따위를 모두 가져왔다. 천이 새까매지도록 열렬히 닦았다. 깨끗해진 결과물을 늘어놓고 보니 뿌듯했다. 어디 더 닦을 게 없나 찾아보다가 갑자기 피로감을 느껴 그만두었다.


다음날 빨개진 엄지와 검지, 중지가 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나는 단순노동을 좋아한다. 몇 년 전에는 코바늘로 색색의 털실을 사용해 담요를 네 장이나 만들었다. 그전에는 뜨개질로 모자와 목도리를 서너 개 만들어서 열심히 하고 다녔다. 그 후에는 재봉틀을 사서 스커트와 앞치마 같은 걸 만들었고, 남는 천으로 컵 받침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선물하기도 했다. 실력이 좋은 건 아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만들고 좀 어설퍼도 용감하게 사용한다.


재봉틀은 지금 내 책상 옆 구석에 놓여 있다. 창고 어딘가에 털실뭉치도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뭔가를 해보는 쪽으로는 금사빠인 것 같다. 쉽게 좋아하고, 그만큼 쉽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언니, 전에 샀던 재봉틀 지금도 써?”

3년 전쯤 동생이 물었다.

“아니.”

“그럼 내가 가져가도 돼?”

“제발 그래라.”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재봉틀을 볼 때마다 헤어진 연인을 보는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동생은 일 년에 한두 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할 뿐 아직까지 재봉틀은 내 눈앞에 있다.


반짝이게 닦은 기념으로 스피디를 들고나갔다. 가볍고 많이 들어가고 대단하지 않아서 좋았다.

“얼마 전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보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2021년을 다 살았네.”

M이 말했다.

“그러게. 이것 봐, 며칠 전 이런 거 다 꺼내서 닦다가 손가락이 이렇게 됐어.”

내가 말했다.

“너도 참……, 우리도 뭔가로 닦아서 반짝이면 좋겠다.”

“나는 흐릿해져서 눈에 안 띄는 것도 괜찮아.”

“올 한 해도 고마웠어. 새해 복 많이 받아.”

M이 말했고, M의 눈도 동시에 말했다.

“나도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M과 헤어지며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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