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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Jan 28. 2022

오늘 하루



  지하철 안에 선물 상자를 든 사람들이 가끔 보였다. 참치나 햄 세트도 있었고, 선물상자는 분명했지만 내용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박스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명절 앞이라는 게 실감 났다.

  타고나서 두 정거장이 지난 후, 앞에 앉았던 사람이 내린 자리에 운 좋게 앉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 새벽 다섯 시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었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올 무렵, 갑자기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목이 간질간질하면서 점점 심해지는 기침으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마스크를 두 손으로 꼭 누르고 있었지만 양옆에 앉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고,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가 섰다. 한 정거장이 그렇게 긴 줄은 미처 몰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열차에서 내렸다.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역이었다. 기침이 잦아들었지만 자판기에서 음료를 사서 천천히 마셨다. 음료수를 마시는 동안 두 대의 열차를 보냈고, 세 번째 들어오는 열차를 탔다. 내 앞에는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 지금 내 말 똑똑히 듣고 있는 거야?”

  뭔가 얘기를 하고 있던 아이가 크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의 엄마가 잘 듣고 있었다고 서둘러 말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앉아 있던 아이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아이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다시 자신들의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좀 전의 아이의 말투는 아이 엄마의 말투였을 것이다. 평소에 여자가 남편이나 아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사용한 듯했다. 내 딸들이 내 말투나 추임새를 그대로 따라 하듯이.


  목적지에서 내린 나는 역 근처의 빵집에서 좋아하는 녹차 카스텔라를 한 상자 샀다. 지난 3일간 치과 료를 받느라 깍지 낀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긴장했던 것에 대한 위로였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 걷는데 노란 승합차가 와서 멈췄다. 영어학원 백을 크로스로 맨 열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차에서 내렸다. 깔끔하고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아이는 내 앞서 걸었다. 천천히 걷다가 내가 앞지를 정도가 되면 후다닥 뛰어 거리를 벌이곤 했다. 나와 같은 출입구로 향하던 아이는 현관 앞 마지막 계단에 발이 걸려 균형을 잃었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다음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어, 왜 넘어졌지?”

  아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혼잣말을 했다.

  “왜 넘어졌을까?”

  아이가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넘어진 일이 창피한 것 같았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멋쟁이 꼬마 입장에선 아주 모양 빠지는 일일 것이었다. 그럴 때는 충분히 음미하고 조심할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다 살고 나서 얻은 진리는 다 살고 난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전에는 우왕좌왕 좌충우돌 사는 것도 필요하다. 상대는 기억도 하지 않는 일에 이불 킥 하면서, 아이 앞에서 수도 없이 했던 말을 그대로 맞닥뜨렸을 때 얘가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운 거야 하면서, 난데없이 멈출 수 없는 기침으로 낯선 정류장에 내려 1월 말의 차분한 노을을 바라보며 오래전에 즐겨 마셨던 음료수를 마시면서, 또 하루를 잔잔하고 재미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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