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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Feb 04. 2022

스노우볼




  늦은 밤, 아버지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눈은 온 힘을 다해 자동차로 돌진해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도로에 떨어진 눈은 녹아 번들거렸고, 길가와 나뭇가지에는 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아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순정한 눈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한 후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 위를 걸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고깔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곳에 아까보다 성긴 눈이 내리는 게 보였다. 주변은 온통 하얀 눈의 나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고 장갑을 벗은 다음 눈을 맞으며 걸었다.      


  10년 전 1월의 마지막 날은 오늘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고 몹시 추웠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지만, 눈 때문에 운전하기 힘들 것 같아 다음에 가기로 했다.

  밤 열 시가 가까울 무렵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떤 감정이 내 마음을 들쑤셔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나는 외투를 입고 가방에 휴대폰과 지갑을 넣은 다음 거실로 나왔다.

  “이 늦은 밤에 어딜 가려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편이 물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눈도 많이 왔고, 오늘은 너무 늦었어. 가 봐야 만나지도 못할 텐데, 내일 나랑 같이 가자.”

  “지하철 타고 가면 돼.”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담 밑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에 얹혔던 눈이 가끔씩 떨어져 내리는 밤길을 걸었다. 수많은 발자국에 다져진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얼음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왜 지금 꼭 가야 하는지 끝없이 회의하면서 나는 고대 안암 병원에 도착했다. 지난 6개월간 일반 병실과 중환자실을 오갔던 엄마는 그날 중환자실에 있었다. 당연히 면회는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기실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고 두 줄 건너 빈자리에 앉아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네가 웬일이냐?”

  화장실에 다녀오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냥 왔어요. 엄마는요?”

  어느새 졸고 있던 내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많이 안정됐대. 새벽까지 지켜보고 괜찮으면 아침에 일반 병실로 올라갈 수도 있다고 그랬어. 전화라도 하고 오지…….”

  흰 수염이 자란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와 있다가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첫 운행하는 지하철을 탔다. 집에 도착해 막 현관문을 열려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아빠.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무슨 일이세요?”

  “엄마가……, 네 엄마가 방금 돌아가셨다.”     


  그날 새벽 병원에서 나와 탔던 지하철은 빈자리가 많았다. 자리에 앉자 종아리로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피곤했던 나는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핏 잠이 들었다.

  “00아, 00아!”

  엄마가 나를 불렀다.

  시험이 끝나고 일찍 들어온 날처럼, 거실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네 아빠와 동생을 부탁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엄마가 말했다.

  “싫어. 나도 힘들어요. 각자 알아서 살라고 해.”

  평소처럼 내가 말했다.      


  그동안 10년이 지났다.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공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집에서 가져온 떡과 과일, 아버지가 손수 만든 생강차 따위를 들고 먼저 집으로 올라간 남편이 왜 안 들어오느냐고 전화를 했다.

  “뭐 살 게 있어서 편의점에 왔어. 곧 올라갈게.”

  전화를 끊고 나는 장갑을 끼고 후드를 다시 썼다. 익숙한 밤길을 좀 더 걸었지만 먹먹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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