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누군가는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눈은 번거로운 것이 된다. 눈은 교통체증의 원인이고, 심하면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타이어와 신발에 밟혀 찰박거리는 검은 눈을 보면 그 말이 더욱 실감 난다. 차라리 비가 왔다면 나았을 텐데, 왜 하필 눈일까?
‘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겨울’이다. 그리고 겨울은 죽음, 고요함, 파멸이라는 이미지로 여러 매체에서 자주 사용된다. 이와 달리 겨울이 지나 찾아오는 봄은 생명과 시작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굳이 겨울을 만들어 두었을까? 모든 것이 하얀 눈에 파묻혀 고요하게 잠든 계절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눈으로 덮인 세상은 마치 새하얀 도화지와도 같다. 눈은 세상을 덮어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태초의 순간을 만든다. 어쩌면 자연은 이 하얀 도화지를 만들어야만 그 위에 새로운 색을 입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에 덮인 세상은 깨끗하고 순수하다. 흰 눈이 쌓여 고요해진 풍경은 모든 것이 시작을 준비하는 무대처럼 느껴진다. 봄이 찾아와 따뜻한 햇살이 비출 때, 겨울은 드디어 그 도화지 위에 물감을 풀어 세상에 색을 입힌다. 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봄은 자연이 겨울에 색을 입혀 만드는 거대한 작품이다.
눈은 단지 겨울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스스로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겨울이라는 도화지가 없다면 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눈 덮인 세상은 마치 자연이 다시 일 년을 보내기 위해 쉬고 있는 모습 같다. 어둡고 고된 계절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시 생명을 준비하는 고요한 숨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