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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Aug 23. 2021

나는 어떤 비를 원할까

7월의 어느 날


집에서 가만히 있는데도 숨 막히는 더위가 며칠간 계속됐다. 이제 7월 중순인데 앞으로 이 폭염을 어찌 견뎌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지구의 환경오염에 관한 기사에 눈길이 갈 정도로 두려운 더위였다. 함부로 사용했던 종이컵 개수를 줄였고, 귀찮아도 텀블러를 자주 이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날은 하루 종일 칩거할 예정이라 기상청 예보를 보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엄마에게 전화해, 이따 저녁 먹고 도서관 옆 공원에서 강아지랑 산책을 하자고 말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거짓말처럼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물이 콸콸 쏟아졌다.


오염된 하늘을 소나기가 씻겨주듯,
흐려진 눈동자를 눈물이 훔쳐주듯,
마음도 슬픔이 닦아야 보석처럼 빛난다.

- 오세영, <슬픔>


고민을 지워주는 빗소리


 안에서 맞이하는 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님이다. (밖에서 만나는 비는 너무 축축하다..)


그날은 비가 내리기 전에 (마음속에) 많은 일이 있었다. 에어컨을 한참 틀다가 추워서 선풍기로 갈아탔다.  있다 보니 선풍기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에어컨을 틀만큼 대단히 성과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에 다시 켜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모든  해결해주었다. 무채색 같은 일상에  존재가 작아지는 듯해 시무룩해질 무렵, 비가 찾아왔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 비와 함께  거센 바람은 정말 시원했다.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도 저절로 불어오는, 전기세 따위  필요 없는 자연이 선물한 바람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원하게 뿌려주는  같았다. 역시 언제나 따뜻한 자연이 나는  좋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어딘가 자리했던 응어리가 잘게 분해되는 기분이었다. 속이 시원했다. 리듬을 타는 것 같은 빗소리에 신이 났다. 그렇다, 사람 감정이 이렇게 단순한데, 뭐가 그렇게 복잡했던 걸까.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비가 잠시 놀러 온 것만으로도 복잡한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데 말이다. 자연이 함께 하는 이 세상은 아직 충분히 살만한 곳인 것 같다.


#Rain, #Nature, #Break


쾅하는 천둥소리는 스물아홉 살이 된 지금도 무섭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천둥소리에 무섭다고 피아노 학원을 땡땡이친 적이 있었다. 부모님 말을 안 들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던 그 어린아이가, 그날은 아파트 현관에서 피아노 가방을 멘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무섭긴 했나 보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내가 잊지 못하는 아홉 살의 기억이니 말이다. 천둥소리 덕분에 오랜만에 어린 나를 만나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멍하니 비를 보는 시간, 비 멍


더운 낮에는 강아지와 산책할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비가 와서 오늘 저녁 산책은 무산됐지만, 대신 베란다 창문으로 함께 비 구경을 실컷 했다. 멍하니 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 빗소리에 귀를 갖다 대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비를 내리는 하늘의 모양은 어떤지 구경한다. 비를 맞는 나무의 자태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본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맨몸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혹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본다. 무언가를 계속 찾아서 보게 된다. 지나칠 법한 수많은 순간들을 깊숙이 관찰하게 된다. 비가 내리면 말이다.


우리에게 비가 필요할 때가 있다. 고민이 멈추지 않을 때, 몸이 말을 안 듣고 무리할 때, 잠시 쉬어가야 하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 때, 나조차도 나를 지우고 지낼 때, 우리는 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비가 올리 없다. 대신 비처럼 당신을 다독여줄 수 있는 존재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게 책 한 권이든, 바벨이든, 바삭한 치킨이든.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먼저겠다.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을 놓치지 않도록,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는, 내가 편안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면 된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나면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쉽다. 나는 오늘 어떤 비를 원할까.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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