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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상상 May 31. 2024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우리 학교는 수업 시간 시작하고 마칠 때 학교종 대신 중학생들이 직접 고른 노래를 선곡해서 틀어준다. 대부분 리듬감 있는 아이돌 노래 아니면 화학 기호나 역사적 지식 등이 가사로 들어간 랩이다. 교무실에서 수업 준비를 마치고 교실로 향하려는데 도입부부터 어딘지 심장을 뛰게 하는 멜로디가 시작종으로 들린다. 더 들어보고 싶어서 가사를 대강 메모해 두고 수업 후 다시 찾아보니 하이키라는 걸그룹이 부른 노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였다. 가사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모두가 내 향길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


나는 웃긴 사람이 좋다. 그리고 타인이 던진 농담에 호쾌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는 꽃고 장미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첫 교사는 엄마일 것이다. 나에게 웃음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 역시도 엄마였다. 노래 가사를 듣는 순간 엄마 얼굴에 꽃잎 같은 웃음이 활짝 피어나던 모습이 났다.



1. 나라는 어린이에게 첫 무대를 선물해 준 엄마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일상인 교사이면서도 기저에는 약간의 무대 공포증이 깔려있는 나에게 첫 무대를 선사해 줬던 엄마 얘기를 해볼까 한다. 다섯 살 때쯤 유치원 행사로 부모님들이 초대받아 함께 했던 이벤트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떻게 그렇게 어릴 때 일을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기억력이 좋아서 기억한다기보다 당시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요동쳤기 때문에 그냥 각인되어 버렸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 이벤트에서는 앞에 나와서 사회자가 시키는 대로 어린이들이 족두리를 쓰고 율동 비슷한 것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원자가 아무도 없자 엄마가 갑자기 나를 추천했다. 당시 나는 너무 나가기 싫어서 몸부림을 쳤는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번쩍 들쳐 안고 앞으로 나갔다. 내가 족두리를 쓰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자 돌연 엄마가 어린이용 족두리를 대신 쓰고 웃긴 표정으로 춤을 춰서 무대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던 추억이다. 꽉 끼는 고무줄 족두리를 억지로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이 어린 나의 웃음코드를 자극했는지, 아니면 극한의 공포를 느끼다가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배가 아플 때까지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타인 앞에 처음으로 선(혹은 설 뻔한) 무대이자, 기억 속에서는 최초로 폭소를 터뜨린 무대이기도 했다.



2언어유희를 즐기던 엄마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스승의 날 기념으로 학부모 명예교사를 모집해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날 하루라도 잠시나마 선생님들을 쉬게 해 드리자는 취지였던 것 같다. 명예교사 모집 안내를 받은 엄마는 기꺼이 참가에 응했다. 드디어 스승의 날이 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는데 엄마는 평소처럼 탁구 유니폼을 입고 패브릭 소재 머리띠를 한 채 등장했다. 어디서든 본연의 모습으로 서있는 엄마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탁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에 앞서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엄마는 언어유희를 활용한 수수께끼 문제를 냈다.


"채소장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도시는"1)

"감은 감인데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감은?"2) 


대강 이런 류의 문제였던 것 같다. 반 친구들은 답을 맞히고 싶어서 너도 나도 손을 들고 정답을 외쳤다. 엄마는 정답을 맞힌 친구들에게 기념품으로 탁구공을 하나씩 주었다. 집에 흔하게 굴러다니던 탁구공이 학교에서는 너도나도 가지고 싶어 하는 선물이 되었다. 평소에도 탁구장 회원들이나 나에게 자주 구사하곤 하던 언어유희를 특히나 반응 좋은 아이들과 함께 즐기니 엄마는 한층 더 즐거워 보였다. 교단에 선 엄마 두 뺨이 발그레하게 장미처럼 물들어 있었다.



3. 몽땅 선수로 만들어버린 엄마


길에서 내 친구를 만나거나 탁구장에 데려오는 경우가 있으면 엄마는 그들을 모두 '선수'로 칭했다. 박민혜에게는 "어이, 선수!", 김세현이라면 "선수 오셨나?" 이런 식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살던 나를 유독 장박사라고 부르시던 걸 보면 애칭 짓기는 약간 집안 내력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나이대 어른들치고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엄마는 이성교제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편이었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던 나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를 탁구장에 데려갔는데, 엄마는 여느 남자애들답지 않게 예의 바르고 침착해서 마음에 쏙 든다며 탁구 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그 애는 엄마와 만남이 끝난 후 하도 선수로 불려서 자기가 진짜 탁구선수가 된 것만 같았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내 친구들뿐만 아니라 탁구장 회원분들도 선수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은근히 기분이 좋으신 듯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애칭이지만 그 한마디로 엄마 곁에 있는 사람들이 즐거워 보여 나도 덩달아 좋았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 속에서 되살아난 엄마의 기억이 또 내 마음을 뒤흔든다. 당장 눈 맞추고 함께 웃을 수는 없어서 때로는 엄마의 기억이 상흔처럼 느껴지기도, 한없이 아쉽기도 하지만 모두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기에 소중하다. 지워진 기억 속 엄마의 편린들은 서서히 사라져 가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여전히 그곳에 살아있는 것이다. 더 흐릿해지기 전에 최대한 자세히 엄마를 기록하고 싶다. 













1) 시드니

2)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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