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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상상 Jun 01. 2024

하얀 민들레

하얀 민들레 꽃말: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

약재로 쓰이며 해독의 효능이 있다. 처의 볕이 드는 낮은 지대에서 자란다.



자는 시간이 그리도 아까운지 두 아이들은 밤만 되면 책을 읽어달라고 졸린 눈을 비비며 조르곤 한다. 수업이 유독 많은 날이라 피곤했지만 마른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열매가 사뿐 민들레』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그 책에는 민들레에 관한 옛날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던 수많은 별들이 땅에 떨어져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아이들은 못내 아쉽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곧 잠자리에 들었다.


내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잠으로 빠져드는 딸을 토닥이며, 나는 어둠 속에서 민들레 책이 불러일으킨 과거를 회상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졌던 친구가 있었다. 엄마가 중학교 때 유방암으로 돌아가시고, 상경해서 친오빠와 사는 친구였다. 엄마가 확진되고 나서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친구를 찾았다.


"다 잘 될 거라는 말은 못 해주겠지만 이 힘든 싸움이 언젠간 끝날 거라는 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친구가 한 말이었다. 그땐 그 말마저 원망스러워 속으로 생각했다.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꼭 그렇게 안 좋은 케이스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 친구는 엄마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환멸스럽게도 암환자의 가족을 노린 사기 치료법이나, 물건들을 비정상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그렇게나 많았고 여러 번 속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 목숨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면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가 어렵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친구는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준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임종을 맞을 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주변에서 들리는 허황된 소리들에 현혹되지 말라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우리 발걸음은 그 친구가 사는 자취방으로 향했다. 친구가 오빠와 함께 사는 그 집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 집에서 하얀 민들레를 그렸다. 약효가 있다는 하얀 민들레를 그리며 엄마의 쾌유를 기원하다 보면 어쩐지 엄마가 나을 것만 같았다. 미술을 전공한 그 친구는 예술가답게 예민하고 섬세했다. 집에 있는 그림 도구들을 몽땅 꺼내온 그녀는 특유의 감각으로 하얀 민들레가 방사형으로 피어난 모습을 그려주었다.


쨍한 주황색 바탕에 그려진 날카로운 파란색 이파리들이, 즐거운 주변 세상 속에서 홀로 느꼈을 그 친구의 아픔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마침 집에 있던 친구 오빠도 이런저런 엄마가 살아계실 때 얘기를 해주며 함께 흰 민들레를 그리고 색칠했다. 오빠가 그려준 민들레는 수더분하지만 환하게 빛나서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나는 뿌리를 깊게 뻗은 민들레 위에 나비를 그려 넣었는데 까만 눈물 같은 물방울이 나비의 몸에서 민들레 위로 떨어지도록 묘사했다. 어쩌면 내 눈물 먹고서라도 그 민들레가 더 활짝 피어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가끔씩 두통이 오거나 말이 잘 안 나오는 것만 빼면 일상에 큰 지장이 없이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친구와 친구 오빠가 선물해 준 그림들을 들고 엄마가 일하는 탁구장을 찾았다. 엄마의 호전을 바라는 나와 친구들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그림을 받아 든 엄마는 한동안 그림을 보더니 고맙다고 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한 때 하늘에서 별로 빛나다가 땅으로 추락했다는 민들레 이야기처럼, 늘 밝던 엄마가 한순간에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은 현실은 절망스러웠다. 그래도 그때는 어딘가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낮은 지대에서 자라는 하얀 민들레처럼 가장 낮은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도 기적이 임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땐 미처 몰랐다. 무기력과 고통, 일상의 상실에 끊임없이 신음하던 엄마가 민들레 홀씨처럼 홀연히 내 곁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왜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을까... 가장 소중한 것은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내 기억은 그때 겨울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또 봄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봄에 핀 민들레를 보며 기억 속 엄마를 더듬어본다. 올해는 국화대신 하얀 민들레를 한아름 안고 엄마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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