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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상상 Jun 07. 2024

수술실 앞에서

Waiting for Godot

새벽과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수술 시간은 끊임없이 지연되었다. 하얀 수술실 문 앞에서 대형 스크린에 떠있는 엄마 이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처럼 수술실 앞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이 서성이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하고 걱정되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 표정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저 하얀 문 너머 엄마는 홀로 길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직 검사만 해도 무서워하고 걱정하던 엄마였는데 이번에는 무려 삭발 후 개두술이라니...


문득 중학교 때 개구리 해부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개구리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마취용 클로로 포름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과학실에서 어떤 개구리들은 마취가 풀려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기도 했다. 여자 아이들은 개구리를 보자마자 대부분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듯 교실 뒤로 물러났다. 남자아이 한 명은 개구리 사체에 난도질하듯 잔인하게 장난을 쳐놓기도 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내가 속한 모둠에는 해부를 하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자원자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내가 칼을 잡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표피 한 겹을 잘라 핀으로 가장자리를 고정한 뒤, 속 피부를 한번 더 가르고 고정했다. 진피에 칼이 스윽 스쳐가는 느낌에 손 끝이 서늘했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선홍색 내장이 젖은 채 드러났다. 잔인하다고 수군거리는 몇몇 여자 아이들의 비난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갔다. 속으로는 무척이나 떨렸지만 해부는 잘 마무리되었다. 뺑글뺑글한 안경을 쓴 과학 선생님은 우리 모둠이 해부한 개구리를 잘 된 예시로 전시해 두었다. 


엄마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훨씬 더 복잡한 수술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었다. 악성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은 주변 신경을 잘못 건드릴 경우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어 무척이나 섬세해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술이라고 했다. 침묵만이 흐르는 그 영원 같은 시간 동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 달리 상상은 마구잡이로 뻗어나갔다. 수술이 잘 안 될 경우 어떻게 될지 자꾸 마음이 낮고 어두운 쪽으로 흘러갔다. 


수술은 예정된 시각보다 세 시간 가까이나 늦게 끝났다. 언제까지고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 하얀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렸다. 지친 표정을 한 의료진 중 한 명이 나와, 수술은 아주 깔끔하게 잘 끝났고 다만 회복기가 필요해 바로 엄마를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개구리 해부가 잘 끝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도감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고 있던 엄마를 다시 선물 받은 듯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두 명의 방랑자, 고고와 디디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는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오지 않는 고도를 마냥 기다린다. 


고고: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디디: 다들 하는 소리지.

고고: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디디: 내일 목이나 매자.(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고고: 만일 온다면?

디디: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중략)

디디: 그럼 갈까?

고고: 가자.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크게 숨 한 번 쉴 수도 없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최선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해 보여도 기다릴 대상이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어쩌면 그 기다림 덕분에 언젠가 다가올 혼자 남은 날들을 조금은 더 담담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를 살게 하는 고도는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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