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리상상 Jun 21. 2024

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은 시간이 일 년 밖에 없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엄마의 투병생활을 오롯이 함께 겪으며,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걸음을 빨리 걸을 수도, 말로 정확한 표현을 할 수도 없는 엄마였지만 그럴수록 무언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은데, 그 끝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가 전달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조금 더 물러서서 천천히 들여다보는 법을. 그렇게 나는 내 마음대로 엄마와 할 수 있는 버킷 리스트를 성급히 추려보았다. 다시 입원해야 할 때가 오기 전에,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함께 먹거나 당시 유행하던 영화를 관람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간장게장을 좋아하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기뻤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신사동이 게장골목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평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면 거의 밤 시간일 때가 많아, 주말이 되자마자 엄마와 지하철을 타고 신사동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이나 계단이 나올 때마다 엄마가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해서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되었다. 


간신히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엄마의 흰머리가 더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건강할 때는 흰머리가 있었어도 꼬박꼬박 뿌리염색을 하던 엄마였지만 확진 이후에는 염색약이 암 환자에게 좋지 않다고 해서 흰머리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하던 엄마가 불과 몇 달 전에 비해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 같아 서글펐다. 한 상 가득 차려진 게장 정식을 눈앞에 두고 잠시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이 엄마 얼굴에 스쳐가는 듯 했지만 엄마는 밥을 먹으며 이내 떫은 감을 씹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의 맛집이라고 했는데도, 내 입맛에는 맛있었는데도 그 때 엄마의 식사는 그냥 늘 그랬다. 항암제나 종양이 엄마의 미각이나 식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먹은 듯 안 먹은 듯 애매하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도둑들’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전지현, 김수현, 김혜수, 이정재 등의 배우들이 출연한, 홍콩의 뒷골목을 엿볼 수 있는 액션 코미디 영화였다. 당시 영화가 인기가 많아서 좌석이 앞자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엄마가 기분전환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냥 보았다. 상영 중에 가끔 옆을 흘끗 돌아보면 엄마는 영화에 집중하는 듯 했다. 약간 입을 벌리고 몰입해서 보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더 이상은 없었다. 입 다물고 교양 있게 먹으라고 늘 잔소리를 하던 엄마의 모습은.     

엄마는 작은 소녀 같기도 하고 연약한 할머니 같기도 했다. 어느 경우든 내가 지켜주어야 했다. 


순간, 영화에서 굉음이 들렸다. 유리가 와장창 깨지고 파편이 날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실감났다. 엄마는 소리에 놀랐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마음에 엄마를 비상구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엄마는 한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영화 중간 중간 그만보지 않겠냐고 속삭여 물어봤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기껏 나들이를 기획한 딸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는지 이후로는 영화가 볼만했던 것인지 아직도 알 수는 없다.      



조금 더 일찍 엄마와 시간을 더 많이 보냈더라면,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더 자주 안아주었더라면,

엄마가 입맛을 잃기 전에 맛있는 식사를 더 자주 함께 했더라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은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늘 타이밍이 지난 뒤에야 오답 노트를 적는 학생처럼 뒤늦게 후회하곤 한다. 교사답지 못하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지쳐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만약 그랬다면 다시 뒤늦게 찾아올 후회와 자책 속에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맬 수밖에.      


늦은 때라 해도 그 때를 동행해준 엄마에게,

그리고 조금은 더 담담한 마음으로 그 때를 추억할 수 있는 현재에 감사할 뿐이다.     

이전 08화 옥수역 귀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