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10여 년쯤 전, 첫 발령이 난 고등학교에서 담임교사가 되었다. 임용 발표 직후 엄마는 갑작스럽게 확진이 되었다. 때문에 두 시간 거리였던 병원과 일터인 학교를 오가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간병인에게 엄마를 맡겼지만 밤의 간병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낮에는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고, 밤에는 비좁은 병원 간이침대에서 설치듯 쪽잠을 자거나, 운이 좋은 기간은 집에서 엄마 약을 챙기고 재활을 도우며 지냈다.
당시 나는 여학생 반을 맡았는데 내가 처한 상황을 위로라도 하듯 한 명 한 명이 다 예쁘고 귀여웠다. 교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많아 주변 선생님들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고 1인데도 아직 아기 같은 데가 있어서 실수도 많았지만, 제깐에는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과 별이 뜰 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곤 했다. 입김이 나오는 복도에서 학기 초 상담을 하면서 가정사를 얘기하다 복받쳐 우는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고등학교 입학과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영어 점수가 많이 부족해서 고민인 아이들과는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따로 찬찬히 나머지 공부를 한 기억도 있다. 다른 친구들이 밟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점수라는 자조적인 의미로 스스로를 디딤돌 패밀리라고 불렀지만,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굳이 그 별명을 고치지 않았다. 담임을 유독 따르는 아이들이라 당시 맡았던 영어 동아리 절반 가량이 우리 반 아이들로 구성되기도 했다. 우리 동아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축제 준비도 순조롭게 마쳤다. 전지에 보드 게임판을 만들고 큰 주사위를 굴려서, 결과로 나온 상황에 적합한 대사를 영어로 말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축제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아이들이 없었는데도 협동을 잘해서 체육대회에서 극적으로 1등을 한 순간도 누렸다. 반티로 산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키가 고만고만한 아이들끼리 팔짱을 끼고 2인 3각 달리기를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한없이 귀여웠다. 아이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늘 웃고 다녔다.
그런데 표정과 감정의 괴리가 컸던 탓인지, 낮과 밤의 온도차가 컸던 탓인지, 낮이나 밤이나 쉴 새 없이 지낸 탓인지 몸과 마음에 슬슬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어깨가 한없이 무겁고 목이 뻐근하고 아팠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웃을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모든 단서들이 내가 무리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나중에 도서관을 찾아 내 증상에 대해 샅샅이 뒤져보고 나서야 그것이 준비성 우울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비성 우울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우울로 예를 들면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며 느끼는 우울이라고 하며, '예비적 슬픔'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엄마의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오랜 항암치료로 인해 엄마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운동선수였던 엄마의 탄탄한 다리가 뼈가 보일 정도로 근육이 빠진 모습을 볼 때, 방향 감각을 잃어 스스로 걷기 힘들어할 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을 때 엄마를 볼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엄마와 먹을 식사를 준비할 때, 나는 주로 밥만 집에서 지어 마트에서 반찬을 사 먹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그조차도 귀찮았다. 모든 것이 무력하고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찬장에 남은 짜파게티를 끓여 엄마와 먹고 있던 찰나,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내 등짝을 힘 있게 한 대 내려치고는 엄마가 먹으려던 짜파게티 그릇을 빼앗았다.
"아픈 사람한테 라면을 먹이면 어떡해! 기다려!"
그녀는 나의 막내 고모였다. 요리 솜씨가 뛰어나 기관에서 요리 선생님으로 일하기까지 한 고모. 고모는 양손 가득 준비해 온 식재료를 빛의 속도로 조리하더니 금세 반찬을 서너 개나 만들어냈다. 얼얼한 등의 감각 때문에 각성이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직 살아있고 엄마가 내 곁에 살아있음이 실감 났다. 그 현실 감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다시 낮과 밤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지탱할 힘을 얻게 되었다. 김남조 시인의 시, <설일>의 한 글귀처럼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를 꾸짖어 줄 누군가가 있음이 감사하고 함께 엄마를 마음 써줄 이가 있음에 감사하다. 먼 길 한달음에 달려온 고모의 야무진 손길, 그 손길에 담겨있는 마음의 깊이를 알기에
설일(雪日)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 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제7시집 ≪설일(雪日)≫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