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나 때문에 오열한 이유
"엄마, 올 때 메로나"
어릴 때 엄마를 기다리며 자주 하곤 하던 통화였다. 양 손에 찬거리를 들고 분주하게 퇴근한 엄마가 주는 아이스크림. 겉으로는 단단한 연두색 사각기둥처럼 보이지만 한 입 베어물면 꽤나 부드럽다. 멜론에 크림을 적당히 섞은 듯한 달콤한 시원함이 좋았다. 늦게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린 시간을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흔하디 흔한 메로나 때문에 내가 미친년처럼 오열하게 될 줄이야.
과거에 엄마가 맥주 한 잔 할 때마다 내게 들려줬던 얘기가 있다.
"엄마 어릴 때 방에 연탄 가스가 샜었어. 집에는 아무도 없고 이모만 울고 있지. 정신없는 와중에 그 어린애를 업고 뛰쳐나오다 벽에 얼굴이 갈려서 상처까지 생겼잖니. 그땐 나도 참 어렸는데도 항상 엄마 노릇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엄마는 위 아래로 언니와 동생들 사이에서 둘째로 자랐다. 성격이 맞지 않는 큰 이모와는 자주 소통을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막내 이모가 힘들 때만큼은 경제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있는 힘껏 도와줬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본인이 힘들 때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으려는 강단이 있었다. 막내 이모가 시집간 후 제법 윤택하게 살게 된 이후에도, 보고 싶어도 참고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자존심 강한 엄마였기에 동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의 눈동자가 각자 따로 놀고 있었다.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후에도, 엄마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경구 투여 치료를 병행했다. 수술로 종양이 절제되었다 해도 일부가 잔존할 수 있기 때문에 방사선 치료를 해야 재발의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뇌종양 때문인지 항암 부작용 때문인지 엄마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말은 점점 더 짧고 느려졌고 체력적으로도 힘든지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잦아졌다. 초점이 잘 안맞는 경우도 생겼다.
입원치료를 받는 동안 우리는 6인실을 썼다. 옆자리는 병문안을 온 가족들로 떠들썩했다. 화장실을 가려는 엄마 옆에 같이 붙어서 이동을 하던 참이었다. 옆 가족들은 과일과 메로나를 잔뜩 펼쳐놓고 먹고 있었다. 엄마가 메로나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가리켰다.
"이...거."
제스처의 의미를 알아챈 문병객 남자 한 명이 재빨리 엄마 손에 메로나 껍질을 벗겨 쥐어줬다.
"엄마, 왜 그래? 미쳤어?!!"
가슴 속에서 툭, 퓨즈 하나가 끊어지는 듯 했다. 아,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왜그래. 엄마, 어딨는거야? 내가 알던 자존심 강한 엄마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그 상실감이 무서워 몸서리가 쳐졌다. 엄마는 천진한 얼굴로 메로나를 먹고 있었다. 그 천진함 앞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오답노트를 쓴다.
아픈 가족을 간병한다는 것은 병으로 인한 그의 변화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것,
어린 아이가 된 듯한 엄마 모습까지 예뻐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어릴 때 엄마 역시 그랬을테니까.
가끔은 엄마가 그때처럼 문을 열고 분주하게 들어올 것만 같아 입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본다.
"엄마, 올 때 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