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사뿐, 눈길을 걸어가듯

by 옆길

이번 주는 눈을 뜨자마자 묵직하게 나를 가라앉히는 고통이 있었다.

단순한 감기겠지 싶었지만 오피스 휴게실에서 하루 종일 몸져누운 채 버티다 결국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몸은 기다렸다는 듯 더 아파왔다.

다음 날 병원을 찾아가니 독감이었다.

소염진통제 알레르기로 타이레놀을 먹지 못하는 나는 결국 입원하게 되었고, 네 시간 뒤 해열제를 복용하지 못한 채 열이 40도까지 오르며 의식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했다.


몸을 짓누르던 고통도 그 순간만큼은 희미해졌다.

멀리서 부모님이 병원 관계자와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열제를 못 먹는 걸 알면서도 입원을 선택한 건 본인들의 선택 아닌가요?”

무책임하게 내뱉는 그 말이 병실 안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나는 서서히 회복 중이다.

엑스레이를 찍다 졸도했던 바로 전날을 떠올리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창밖을 보니 단풍잎들이 겨울을 눈치챈 듯 작아지고 흩어지며 길가에 가을의 향을 남기고 있다.


몸이 조금씩 나아가듯 계절도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내 열이 식어갈수록 바깥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시리다.


겨울을 떠올리면 언제나 ‘눈’이 생각난다.

좋은 듯, 슬픈 듯, 가끔씩 내리던 그 눈. 가을이 지나고 “이제 내가 왔다”고 속삭이듯 조용히 세상을 흰색으로 덮는다.


나에게 그 흰 세상은 새로운 색깔로 날 칠해도 된다는 듯 속삭이는 듯했다.


예전 어느 눈 오는 날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의 한 남자가 퍽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헐, 아프겠다.’ 생각했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걸어갔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그 부끄러움, 그 애써 태연한 표정. 나도 모르게 웃으며 그를 지켜봤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는 것.

겨울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든 성장의 흔적이든 차갑게 굳은 마음을 녹이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이번 겨울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한 가지 하고 싶은 건 도쿄에 있는 동안 꼭 삿포로에 가겠다는 다짐이다.

1박 2일이어도 괜찮고, 혼자라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거기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눈싸움도 해보고, 혼자 멋진 뷰를 보며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겠다.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던가.


끝자락의 가을, 그리고 곧 맞이하게 될 시리고 시린 겨울도 얼른 왔으면 좋겠다.

행복해 보이는 내 미래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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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