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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바다 Jul 29. 2021

길냥이 밥그릇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

1. #동물이왜좋아? #캣맘 #캣대디




 학업 때문에 현재 있는 동네로 이사 왔을 때가 2019년 9월이었다. 연고지 하나 없는 곳이었고, 아직은 학교에 아는 친구도 하나 없던 때였다. 이사 오고 한 달쯤 후부터 아파트 샛길에서 하얀 고양이를 자주 발견했다. 새하얗지만 밖에서 산 세월을 말해주는 듯 꼬질꼬질했던 한 마리의 다 큰 고양이. 한쪽 귀는 크게 잘려 있었다.

 전 동네에서는 길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 광경은 신기하고도 이상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낮에 버젓이 인도를 걷는 길고양이라니? 그저 신기해서 쳐다만 보았던 걸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길거리에서 동물을 만지면 (심지어 산책하는 애완견까지) 손에 병균이 옮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로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 하얀 고양이를 보았을 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길고양이가 하얄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아파트를 지나다닐 뿐이었다.


 1년이 지날 때까지 그 하얀 애와 자주 마주쳤다. 솜뭉치 같은 게 멀리서 움직여서 쳐다보면 그 고양이었다. 그때쯤에 나는 학교 친구를 여럿 사귀었는데, 나와 함께 집에 가는 길에 그 고양이를 볼 때면 모두들 너무 예쁘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애를 여러 번 쓰다듬곤 했다. 나는 그때도 그저 옆에서 멀뚱하니 친구들이 하는 냥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들 다리 주위를 뱅뱅 도는 고양이의 사회성에 감탄하며. 좋게 말해 '감탄'이지 한 마디로 별로 관심이 없었다.


2019년 겨울, 친구와 하얀 고양이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 중 한 명이 나에게 그 고양이가 분양받은 품종묘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양이들은 교미를 하면 섞이는 종이 바로 털 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새하얀' 애라면 길거리에서 태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누군가가 키우다 버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짠해졌다. 원래는 길에서 나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니? 인간에게 버려져서 길거리에 나오게 된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 그 하얀 고양이에게 제대로 눈길이 갔다. 그러자 이번에 내가 느낀 것은 '한쪽 귀가 정말 많이 잘렸구나' 식의 감탄이 아니라 '아프진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걱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해졌다.


그 후 한 동안 그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얀 고양이가 사라지고 나서 남은 것은 누군가가 사료를 넣어 주었던 밥그릇 하나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하얀 고양이의 아지트인 이유는 누군가가 사료를 챙겨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밥그릇이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뒤쪽 샛길 입구에 있는 정자였는데, 보통 사람들이 담배를 피울 때 오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가끔 담배를 피우러 와서 그 고양이를 쓰다듬기도 했고, 거꾸로 그 고양이를 보러 정자로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름 유명묘(?)라서 나는 그 고양이가 아파트 인도 한가운데를 걸으면서 주민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하는 모습도 몇 번이나 보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그 하얀 고양이를 좋아했다. 1년 넘게 지켜보는 동안 고양이의 밥그릇에 사료는 빈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밥그릇의 주인이 사라지자 사료는 더 이상 줄지 않았고, 당연히 새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대신 시간이 흐르면서 말라가는 사료 위로 담배꽁초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이 쌓여 밥그릇이 재떨이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직 사료가 남아 있던 그릇이었는데... 그 위로 쌓인 담배꽁초는 속이 다 터져 있었고 꽁초에서 떨어진 담뱃재는 그릇 안에 수북했다. 고양이가 돌아오면 저 밥을 먹을 수 있을까?나는 의아했다. 그리고 정자를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담배꽁초를 집으로 가져가 버리지 않고 그 그릇에 넣었을까?'


  길바닥이 아닌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게 그들의 양심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하얀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그릇은 누군가가 고양이를 위해 놓아두었던 것이었는데, 그들은 왜 자신이 재떨이처럼 쓰려 하는 것이 1년 넘게 한 생명을 지탱해준 밥그릇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었고, 사실 그렇게 예뻐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온갖 생각이 들었다. '버려졌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과, 많이 잘려있던 한쪽 귀와, 재떨이가 된 밥그릇이 차례대로 연결되면서 그동안 그 애가 살아왔을 길거리의 삶이 상상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자를 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동시에 떠오른 또 다른 사실은 그래도 누군가는 정자에 밥그릇을 가져다 놓고 그곳에 꾸준히 사료를 채워왔다는 것이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 밥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공간에 누군가는 밥을 채우고 누군가는 담뱃재를 채운다. 그 부분에서 많은 메타포가 보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 즉 '캣맘', '캣대디'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 내용 때문에도 그랬지만 길고양이가 야생이라면 스스로 살아남을 것인데 왜 굳이 인간이 간섭을 해서 트러블을 만드나 싶기도 했던 것이다.

 밥 때문에 모여드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는 결국 이웃에게 피해가 되어 분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키우지도 못할 생명에 대한 어설픈 동정이 오히려 길고양이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사람 손을 타면 어떻게 야생에서 살아남나?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하얀 고양이도 여태껏 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통이 된 그릇을 보며 쏟아지는 의문 끝에 내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만약 인간이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내가 바라는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남의 밥그릇에 담뱃재를 채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 밥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물음보다 중요한 것은 '밥을 준다'는 행위 그 자체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다는 행동 너머에 있는 사고방식은 무엇일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 밖에 나와서 누군가의 끼니를 챙겨준다는 것은 솔직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임감과 동시에 성실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소홀해지기 쉬운 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키우지도 않는 고양이들을 위해 몇 년 동안이나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나가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걸까?


 내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군가가 밥그릇(오른쪽)을 비우고 따로 쓰레기통(왼쪽)을 놓아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쓰레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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