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대한 고찰
누구나 하지 못한 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말은 명치에 묵직하게 엉겨 있어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비밀리에 시간을 내어 떠올리는 것일 수도 있고, 남몰래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최근에 읽고 있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주인공의 명치에는 무언가 엉겨 붙어 꽉 막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막혀있는 것은 너무 많은 고기들을 먹어서, 고기들의 울부짖음과 목숨이 엉겨 붙어있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래서 주인공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명치의 갑갑함에 브래지어를 하지도 못한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크고 작은, 심각하거나 단순한, 적어도 일말의 하지 못한, 하지 못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 우리 몸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수시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떨림, 불편함, 답답함 등 다양한 감정을 동반한다.
나는 그것이 때때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슬픔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렇게 그 슬픔에 잠식될 때면 황인숙 시인의 '우울'에서와 같이 알 수 없는 영역에서 하염없이 뚱뚱해져 덩그러니 붙박인 채 눈을 끔뻑일 뿐이다. 세계와 나는 분리되어 개입하지 못할 곳에서 하지 못한, 하지 못할 말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슬픔이라는 것은 지니고 가서는 안될 감정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세계와 나를 불투명한 유리막으로 분리시켜 서서히 옥죄기 때문이다. 그 막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팽창해 가는 것이다. 언젠간 그 막 안에서 터져버리지 않을까.
슬픔이란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내가 증오하는, 그래서 내 영혼을 그 복잡함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죄의 상태이다. 이 일기장은 내 마음속에서 행복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슬픔은 복잡한 얽힘이다. 앙드레 지드, <좁은 문>
그렇다면 슬픔은 나의 영혼을 복잡하게 하는 죄의 상태가 아닐까. 슬픔이 죄에서 수반되기도 하겠지만, 그저 이 땅에 태어나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죄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마음속에 행복을 간직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4
내 안의 말이 다른 형태로 변모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일기를 쓰라고 조언한다. 다만 일기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 덩어리는 직접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 놓아야만 그 덩어리가 풀어지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어렸을 적 절친한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아버리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비밀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순간 비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털어놓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덩어리를 풀어내야 할까. 나는 그때 소설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것은, 허구의 인물에게 말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동안 기피해만 왔던 소설들을 다시 들어 작가들의 그 말을 알아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말도 언젠가 풀어내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슬픔에 잠식되지 않으려 한다. 슬픔에 잠식하게 되면 유일한 좋은 점은 세계와 분리되어 나의 영혼이 막 안에 갇히기 때문에, 내 영혼과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더 이상 갇히지 않고 다만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막 안에서 터져버리기 전에 풀어내려면 나는 글을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