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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10. 2024

09. 달밤에 축구하다

강의실에서 수많은 손으로 나타났던 그가 사라진 뒤로부터… 곧 그를 다시 보게 되리라는 예감은 있었다. 밤늦게 다시 연구실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어두컴컴한 강의실에서 홀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피교수가 예상한 만남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운동장에서 추억에 젖어 공을 차다가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발을 끌며 다가온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동희라고 불러야 하나? 동성이라고 불러야 하나? 사망진단서를 가져왔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손들의 에 대해서?... 어느새 그가 골대 앞으로 나와 피교수를 마주 보고 섰다. 마치 상대편 수비수처럼… 피교수는 말을 건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공을 차 보냈다. 내가 지금 귀신에게 공을 찬 거야? 당황할 겨를도 없이 상대방은 그 공을 다시 차서 보냈다. 무슨 뜻이지? 내 질문이 맞다는 건가? 아님 틀렸다는 건가? 것도 아님 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설마 이 달밤에 나랑 축구를 하자는 것인가?....

동희가 한 손을 높이 들었다. 그날 강의실에서처럼 그가 다시 말을 걸고 있었다. 이제 피교수가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공으로 답이 왔으니 공으로 풀어야 했다. 그는 골대를 지키고 서 있는 동희를 향해 드리블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왠지 데자뷔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동희가 절뚝거리며 각을 좁혀온다. 피교수는 어린 시절에도 풀백 전담이라 공을 다루는 기술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좌우로 공을 돌리며 그를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치 그의 체를 벗겨내려는 듯이… 그러나 동희는 피교수의 시도를 손쉽게 막아냈고 매번 공은 동희의 발과 다리에 맞고 튕겨져 나왔다. 이상한 것은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진 피교수보다 동희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전력을 다해서 방향을 바꾸어 달리면 그는 어느새인가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교수는 숨이 차올랐지만 상대에게는 아무런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반 피교수의 조심스러운 긴장과 집중은 어느새 어린 시절 공을 빼앗겼을 때의 불만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무리하게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를 젖히면서 힘차게 공을 찼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다리가 찬 것은 동희의 정강이였고 두 사람은 나뒹굴었다.


피교수가 몸을 일으키며 괜찮냐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는 벌써 일어나 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불편한 다리를 얻어맞아 그는 더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피교수의 표정을 읽은 것처럼 그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며 절던 다리를 무릎 뒤로 접어 올렸다. 그리고 다리 하나로 공을 몰아 피교수가 처음에 있던 자리에 가서 섰다. 자연스럽게 공수가 바뀌었다. 피교수는 골대를 지키고 있었고 동희는 본격적인 드리블을 시작했다.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들고 한 발로 겅중거리며 공을 몰고 뛰는 그의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 경이로웠다. 그가 갑자기 팽이처럼 돌더니 어 하는 순간 강력한 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피교수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골대에서 공을 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겅중겅중 다가오는가 싶더니 피교수는 헛발질을 했고 공은 다시 골대 안에 들어가 있었다. 피교수는 이번엔 롱킥을 하고 달려 나갔다. 동희는 공중에서 공을 커트해서 바로 눈앞으로 몰고 왔고 피교수가 반응하기도 전에 또 공은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3:0... 피교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이번에는 손으로 공을 몇 번 튕겼다. 동희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피교수는 럭비를 하듯 공을 손으로 껴안고 기습적으로 달려 나가 그를 젖히면서 다시 롱킥을 시도했다… 고 생각했지만 그의 발은 허공을 갈랐다. 동희는 어느 틈에 공을 가로채 저만치 다리 하나로 공을 몰고 가 서있었다. 피교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마구 다리를 뻗어 공을 빼앗으려 했지만, 동희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은 채 공을 요리조리 빼돌렸다. 수십 번 발을 뻗었지만 단 한 번도 피교수의 발은 공에 닿지 못했다. 어렸을 때 개인기 좋은 친구의 공을 한 차례도 빼앗지 못했던 치욕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숨이 턱에 찬 피교수는 고함을 지르며 거친 태클로 동희에게 몸을 날렸지만 빈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는 어느새 멀찌감치 물러나 발등으로 공을 툭툭 차고 있다.


누구냐 넌…”


그는 헐떡이는 피교수의 말을 들은 듯, 발등에 공을 붙인 채로 그의 주변을 팽이처럼 회전하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됐다. 바람 소리가 웅웅대기 시작했고 동희는 점점 빨라져 그 숫자가 하나, 둘, 셋,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회전하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였다. 축구공은 룰렛 속의 주사위처럼 수많은 다리들을 맞고 튕겨 나와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교수는 동희의 벽에 갇힌 느낌이었다. 바람 소리에 섞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 같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나는…”


“그래 대체 누구야 넌?”


우리는…”


“동성이냐? 아님 재현이, 성빈이, 동희… 누구야?!...”


“우우우~~~”


웃음이지 울음인지 모를 음산한 소리와 함께 바람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축구공은 피교수를 향해 더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피교수는 공에 이리저리 쫓기다가 넘어졌다. 달아나기를 포기하고 목소리들을 향해 쉰소리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 알았다. 동성아, 미안하다. 연극하다 다쳤는데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맞아, 그때 너보다 공연걱정을 더 했다. 그렇게 다시 못 보고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무심했다! 재현아, 말 한 번 더 걸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성빈아, 아무 기억도 없어서 미안하다. 동희야, 널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


우우우~~~ 많아... 우린… 더 많아!.. 우우우우~~”


“많아? 더 있다고? 그럼 날 보고 어쩌란 말…!”


목소리들이 구슬픈 울음소리로 바뀐 순간 방향을 바꾼 공이 날아와 일어서는 피교수의 얼굴을 강타했다. 너무 세게 맞아 피교수의 안경이 날아가고 그는 뒤로 넘어져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아스라이 정신을 잃는 순간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그는 그것이 부디 맹조교이기를 바라며 눈을 부릅뜨다가 정신을 잃었다.


운동장 끝에 자리한 교련 훈련장은 작은 숲과 이어져 있다. 숲 언저리에는 각개전투 훈련을 위한 호와 철조망들이 설치되어 있고 숲 초입에는 타이어와 나무 구조물들로 만들어진 각종 장애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을 돌파해 경사면을 올라가면 나지막한 고지가 가로막는다. 고지 반대편은 바로 바다를 면한 절벽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지형이 험해져 바위들이 할퀴듯이 위로 솟아 있고 세월의 짐이 무거워 구부러진 해송들이 우거져 있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와 해암들이 거세게 부딪히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다. 이곳에도 늘 바다 안개가 껴 있는데, 이 장소는 학내 커플들이 낮에 밀회의 장소로 아주 가끔 이용하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목숨을 끊은 원혼들이 많다 하여 ‘귀신의 절벽’ 혹은 ‘통곡의 바다’로 불린다. 우우우우~ 하고 들리는 바람 소리가 귀신의 곡하는 소리처럼 들려 밤에는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예전에 운동부에서 담력 시험을 한답시고 한밤에 이곳에 신입부원들을 보냈다가 몇몇이 기절하는 바람에 이곳은 금단의 장소로 기피되고 있는 곳이다.

피교수는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안경이 없어서 모든 것이 부옇게 보였다. 가까워진 파도소리와 우웅거리는 세찬 바람으로 미루어 자신이 귀신의 절벽 근처에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끙 소리를 내며 움직여보려고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들렸다. 등을 지고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검은 몸통 두 개가 살짝 보였다. 하나는 동성, 다른 하나는 더 작은... 익숙한 음성이 분명하게 들려왔. 피교수 자신의 목소리였다. 마치 머릿속에서 동성이의 대사를 읽고 있는 듯한....


“저기 서 있는 인민군 소년병저 아이는 그날 강의실에도 있었어요… 이름은 석금동... 이북 고향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잃었대…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고… 근데 여길 빠져나갈 수가 없대… 도와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어도 아무에게 닿지 않아… 지뢰가 터져서 쟤 입이 귀까지 찢어졌는데.. 피가 지금도 줄줄 나는데… 그 찢어진 입으로 나 여기 있다고 삼천 번쯤 비명을 지르면… 어쩌다 한 사람쯤 움찔하며 돌아본대. 삼천 번의 비명, 단 한 번의 시선….”


피교수는 자기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말을 해보려 했지만 몸이 마비된 것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동희는 피교수의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건조한 대사에는 점차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산 사람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때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았어... 공비에게 죽은 할아버지는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하룻밤 사이에 간첩으로 둔갑했고, 나는 대학에 숨어든 빨갱이로 제적되어 군대로 끌려갔어. 매일 밤 얻어맞고… 전향하지 않으면 죽여서 휴전선에 버린다는 협박… 난 살아남기 위해 날 버려야 했어. 그리고 그 지옥을 잠시 벗어난 첫 휴가, 아무도 만날 수 없었던 그 휴가 마지막 날 이곳에 왔어. 다시 돌아가느니 이곳에서 그만 끝내고 싶었어. 운동하고 교련 마치면 친구들과 웃으며 땀을 식히던 이곳.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바다를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던… 기억해요? 여기 같이 왔었는데….


피교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언제 이 아이와 이곳에 왔었단 말인가? 그 보다 동희가, 아니 동성이가 강제 제적되어 군대에 끌려갔고, 결국 이곳에서…? 그럼 사고사였다는 학적부의 기록은? 그럼 재현이와 성빈이는?...


머릿속 자신의 음성으로 답이 돌아왔다.


“재현이는 두 번 마주친 게 아니라 그 방문 앞을 떠난 적이 없어요… 성빈이는 그 까만 야상을 걸치고 늘  뒤에서 손을 뻗으며 수천 번 당신을 불렀어. 손가락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야… 당신이 발견한 우리 네 명 뒤에는 더 많은 나와 우리의 얼굴들이 당신을 부르고 있었어."


피교수는 안간힘을 쓰며 속으로 외쳤다.


‘대체 내게 왜?!'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도 보지 못하니까…. 그리고 당신이어야 했으니까…. 당신만이라도 제대로 기억해 주길 바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나냐고?!'


머릿속 대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멈추고, 파도 소리도 사라진 채 정적이 흘렀다.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기억이라는 단어가 피교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기억… 지난 12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떠나갔던 학생들… 그저 강의실에 앉아있는 머리 숫자가 아닌, 이름과 얼굴과 추억으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학생들이 몇이나 될까? 갑자기 12년 전 동성이와의 마지막 만남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연극이 끝난 후 한 번 더 그를 찾아왔었다. 그는 아직 목발을 짚고 있었다. 피교수는 회의 시간에 늦어 급히 나가다가 문 앞에서 그를 마주쳤다.


“어… 학생 무슨 일이야?”


“아 교수님… 그냥 지나다가 인사드리려고…”


“아 그래? 참, 다리는 이제 괜찮아?”


“네…”


“그래 다행이다. 건강 잘 챙기고 강의실에서 보자.”


“네.. 저 교수님…”


“왜?”


“제가 아무래도 학교를 잠시 떠나야 할 거 같아서요.”


“왜? 군대 가?”


“네, 가긴 가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드릴 말씀이…”


“아 미안한데 내가 지금 바빠서 말야. 나중에 다시 들러줄래?”


“교수님, 잠깐이라도 어떻게


글쎄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


그는 등 뒤로 손을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그게 다였다. 그날 피교수는 동성이의 이름도 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과 그가 맡았던 배역을 확인한 것도 동희가 나타난 이후였다. 그는 그저 바쁜데 용건도 눈치도 없이 들러붙는 답답한 학생일 뿐이었다. 피교수에게 그날의 짧은 만남은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의 자투리였다. 그러나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그를 찾아온 동성이에게는 그날 온 세상이 등을 돌린 것이다. 버티고 싸울 몸과 정신이 부서진 그는 결국 이곳으로 발길을 돌려 마지막 선택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지웠지만, 그의 억울한 영혼은 이 통곡의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고 들어줄 사람, 기억해 줄 사람을 찾아 12년 간 애타게 헤매온 것이다. 피교수의 눈이 젖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끅끅 소리를 내며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입이 열렸지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몰랐다는 변명도, 그 많은 학생을 어찌 다 기억하냐는 항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너무나 아플 뿐이었다. 12년을 꽉 채운 그의 외로움, 그의 막막함, 살기를 포기한 절망의 어두움이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고 피교수는 동성이의 생애 마지막 순간으로 끌려들어 갔다.


암흑. 사방이 막힌 벽. 발 밑이 꺼지는 것 같은 철렁함으로 휘감는 형언할 길 없는 절망과 공포. 모든 살아있는 것들로부터의 단절, 홀로 버려막막함…. 숨이 턱 막힌다. 벽을 미친 듯 두드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진공 속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동성이의 격한 움직임은 점차 느려진다. 얼음 같은 망각의 밀물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와 기억의 방들을 하나씩 집어삼키면서, 벽을 치는 그의 주먹은 점차 약해지고, 눈과 입은 생기가 떠나가며 공허하게 벌어진다. 물이 가득 찬 그의 마지막 기억의 방은 심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공허의 냉기, 잿빛의 고요. 마지막 순간 빠끔히 저 위에 별이 한 개 보인다. 자신과 앉아있는 누군가의 얼굴... 그는 얼어붙은 머리를 천천히 들어 그 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열린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경직된 육신에서 빠져나온 그가 붕 위로 떠오른다.... 피교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쿠르르~쿠쿵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이 묵직하게 울리는 진동에 피교수는 눈을 떴다. 선잠을 깬 사람처럼 이곳이 어딘 지 어리둥절하다가 손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웬 황갈색 개 한 마리가 그의 손을 핥고 있다가 그의 눈과 마주치자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다. 그는 개를 멍하니 보다가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공에 맞아 부은 눈두덩이에 안경이 얹혀 있었다. 하늘은 어슴푸레 동이 터오고 있었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절벽 끝자락에 위태롭게 앉아있었다. 비로소 밤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동희, 아니 동성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 몸을 추스르는데 개가 갑자기 멍멍 짖어댄다. 시선을 돌린 그의 발 앞에 뭔 가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신발 한 짝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버려진 것 같았다. 반쯤 흙 속에 묻혀 밑창은 보이지 않았고 끈은 삭아서 거의 없어졌다. 그나마 남은 형체는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듯이 쪼그라들거나 해져서 흙과 구두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성이가 남기고 간 마지막 인사 같았다. 피교수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바스러질 것 같은 신발의 잔해를 쓰다듬으며 다시 개를 돌아봤다. 개는 피교수의 눈을 그렁그렁 마주 보다가 앞발을  위에 얹으며 엎드려 낑낑거린다. 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개를 끌어안았다.



“허허…”


손수건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의 손에 뭔가 다른 게 잡힌다. 낡은 편지 봉투다. 색 바랜 만년필 글씨가 쓰여있다. 그는 눈을 찌푸리고 읽다가 안경을 벗어 들고 살핀다.


“가만… 내 안경이 아닌데…”


갸웃하며 다시 안경을 쓰고 눈에 힘을 주고 찬찬히 읽는다. “조부 사망진단서.” 봉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낸 읽어본 그는 얼굴을 떨군다.


멀리서 성당 종소리가 들려온다. 첫 번째 종소리가 멎고 얼마 후 두 번째 종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에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아직도 얼얼한 얼굴을 부비고, 다른 손으로는 옆에 앉아 꼬리를 여전히 흔들고 있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피교수의 시선은 물끄러미 절벽을 따라 내려갔고 바위에 부서진 파도의 하얀 거품이 반사하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개와, 그리고 멀찌감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년병이 그렇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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