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2024년 5월장문의 추도사-‘오비튜어리(OBITUARIES)
20245월 18일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그것이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공자의 경험담을 설명한 문장으로 흔히 나이 칠십을 종심(從心)이라 일컫지요.
2024년 5월 18일, 머리가 하얗게 센 70살 넘은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의정부 종합고등학교 보통과 반창회가 이강연 회장의 열성적인 참여 독려와 애교 섞인 협박(?)으로 23명이나 되는 동창들이 열 일 제쳐놓고 오로지 옛 친구들의 얼굴 보고 싶은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을 친구는 ‘이창선’과 ‘유병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장 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려운 걸음을 해 주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음에도 친구들에게 밝은 웃음을 선사해 준 두 친구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4와 보통과 모임에 초석을 닦은 신복룡, 김천주 등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참석하기로 약속했으나, 긴급한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 김두식, 김종옥, 김영욱 등도 참석한 거와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임도상, 황창수, 박상배, 김창식, 최만섭 동창을 비롯한 많은 친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 일부를 신께 미리 돌려보내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도, 오늘 이 자리에 굳건히 함께했습니다.
여기 모인 많은 동창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치열한 생존 의지로 악성 종양의 무자비한 공격을 이겨내고 감격스러운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이강연 회장 또한 뇌 수술이라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근원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2024년 6월 1일부로 새롭게 회장직을 이행할 김진규 박사와의 경험에서 그의 종심(從心)을 여러 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 동창 모임의 화두는 ‘성공 신화’가 아니었을까요? 우리 자랑스러운 동창이 어떻게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였는가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작은 영웅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삼보회 출신이라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던 그런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매일 기름칠하고 가끔 정비소에 들러서 고장 난 부품을 교환하면서 조심스럽게 관리해야만 운행이 가능한 수십 년 된 중고 트럭을 운행하는 운전기사와 같은 겸손한 마음만이 우리들 건강의 지킴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이러한 하심(下心)을 가진 친구의 의미를 한신대 윤평중 교수의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라는 수필에서 찾고자 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알아주는 이 없어도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서로 다르면서도 동등한 관계에서 태어나는 게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
실로 오래간만에 만나서 가득 찬 술잔을 부딪치면서 다음 모임에 건강한 몸과 설레는 마음으로 만날 것을 몇 번이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편안하게 잠을 이룬 다음 날인 2024년 5월 19일 ‘승원식’이 사망했다는 청천 벼락같은 비보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소설가 백영옥과 사상가 데이비드 브룩스가 지적했듯, 한 사람의 가치는 이력서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이력서가 세상의 기준에 맞춘 성공의 목록이라면, 추도사는 한 인간이 남긴 고유한 삶의 향기와 품격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소중한 역사임을 일깨워 줍니다.
전통적인 역사가 왕과 영웅, 전쟁 같은 거대 담론에 집중했다면, 현대 역사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 혹은 ‘미시사(Microhistory)’라 불리는 흐름 속에서, 이름 없는 개인은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고, 일기, 편지와 같은 개인의 기록은 더 이상 사소한 흔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과서가 놓친 시대의 감정과 진짜 역사를 복원하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고인이 ‘인정이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작은 사실 하나하나가 기록될 때, 그 기록은 역사를 더욱 풍부하고 인간적으로 만듭니다.
나는 동창들이 단체 카톡에 올린 추모 글에서 왜? 고 승원식에 대한 추도사가 장문이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삼보회 카톡에 김순문이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어제 모임 때 내 옆에 앉아 나보고 "너는 부동산 하면 안 돼. 직업상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라고 했던 원식이에게 하루 사이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게 믿기질 않아. 놀랄 일이다. 좋은 친구로 잊지 않을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에서 군자는 화합하되 자기의 소신이나 의로움까지 저버리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 승원식 님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살고자, 산을 사랑하였고 수없이 백두대간을 종주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솔직했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던 고 승원식 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