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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죽을 권리 08화

죽을 권리

15. 1985년 6월 5일

by 글마중 김범순

작가 미상 : 2018년 카카오톡에서 다운밭은 사진


주치의가 아침에 K에게 물었다.

“좀 어떠세요?”

K는 순하고 작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K는 그때부터 응하고 반말하지 않고 존칭어를 썼다.


비위관 튜브도 제거했다.

이제 수저로 미음을 떠서 직접 입에 넣어 먹이게 된 것이다.

너는 환희에 휩싸였다.


벅찬 환희는 사레가 들려 미음을 넘기지 못하고 입 가장자리로 주르르 흘리면서 끝이 났다.


물리 치료사가 왔다.

재활 치료를 하러 매일 온다고 했다.


K가 마음껏 코딱지를 파고 있는데 K의 누나가 왔다. 간질이면 화낸다는 너의 말을 듣고 누나가 K의 오른쪽 발바닥을 간질였다.


K가 혀를 차며 싫어하자 누나가 물었다.

“왜, 간지러워?”

“그럼!”

K의 누나 역시 다 나았다고 아주 기뻐하며 돌아갔다.


점심에는 아침보다 사레가 훨씬 덜 들렸다.


수저로 미음을 떠먹이니까 식사 시간이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시간 많이 걸리는 것도 그렇고 약이 쓰다고 안 먹으려 해서 아주 고역이었다.


인턴이 기도 뚫었던 자리를 소독하며 그제 밤 중환자 두 명이 숨졌고 어젯밤에 환자가 새로 왔다고 했다. 고등학생인데 생명 유지가 불가사의하다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레지던트 과정의 주치의와 인턴은 밤낮없이 깨어 있으려 노력했고 식사 시간을 아껴가며 연구실에 모여 토론했다. 물론 토론의 중심에는 과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학의 발전은 의사들이 기울인 노력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낮에 많이 깨어 있어서 그런지 K는 초저녁부터 곤하게 자고 있다.


1985년 6월 7일 주치의가 미음을 배로 늘이라고 했다. K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질려서 그런지 미음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항상 괴로워하는 K

오른쪽 입가로 침을 흘리는 K

오른쪽 팔다리가 축 늘어진 K

사레들리며 미음을 받아먹어야 하는 K

오른쪽 골반의 욕창이 자꾸 커지는 K


너는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 그늘은 삼천리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K가 죽었으면 너는?


부모 그늘은 천 리

무능한 너는 아이들에게 한 뼘의 그늘도 만들어주지 못해 가슴이 미어졌다.


약 한 봉지가 줄었다.

K가 일어나 앉고 싶다고 했다.


너는 언제 서글펐느냐는 듯 씩씩하게 K 머리맡으로 가서 어깨 밑에 두 손을 넣어 밀어 일으켰다.


K의 수양아버지가 박카스를 사 왔다. K는 박카스는 싫고 요구르트가 먹고 싶다고 했다. 수양아버지는 얼른 나가서 요구르트를 사 왔다. 혈연으로 얽히지 않았을 뿐 아버지 마음이 고스란했다.


점심에는 식기 가득한 미음을 한 시간 만에 먹일 수 있었다. 식사 후 팔다리 운동을 해주며 K와 너만 알고 있는 무법자와 박쥐의 숨겨진 비밀을 까발렸다. K는 재미있다며 아주 많이 웃었다.


손등과 팔의 혈관이 터져 K는 3일 동안 링거 주사를 못 맞았다. 어젯밤에 간신히 혈관 찾기에 성공해 주사를 놓았는데 또 부어올라 걱정이다.


병실은 후텁지근한데 바깥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시원한 바람을 따라 막내를 업고 K와 두 아이 손을 잡고 학교 옆 오솔길을 걷고 싶다. 언제나 그런 날이 돌아올까?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전화 통화를 길게 했다. 딸과 통화가 끝나자 큰아들이 1등 했다고 자랑을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는 시어머니 보란 듯 딸을 잘 키우고 싶었다. 일찍 한글을 가르쳐 만 세 살 크리스마스 때 시어머니한테 카드를 보냈을 정도였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깨달았다. 복수를 위장한 비겁한 너의 헛된 욕망이고 비뚤어진 교육관이라는 것을


K를 닮아 두뇌가 명석한 큰아들은 선수 학습을 전혀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터진 것이다. 지난번 받아쓰기 40점짜리 시험지를 보았다. 한글이라도 가르쳐 입학시킬걸. 너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큰아들은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공부 잘하고 싶은 총체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K의 형과 시어머니가 왜 6인실로 안 옮기냐고 추궁했다.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았다.


너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16. 1985년 6월 8일


문경무 산토리니.jpg

작가 : 문경무

작품명 : 산토리니


처음으로 미음 대신 고기죽이 나왔다.

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이제 링거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주치의가 잡고 일어나 앉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끈을 매 주고 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다. K는 끈을 잡아당기고 너는 뒷머리를 받치고 힘껏 밀어 반쯤 일어났다.


“아 - 구구!

K가 어지럽다고 비명을 올렸다. 야호! 오늘 반쯤 일어났으니 며칠 뒤에는 앉을 것이다.


팔다리 운동을 해주며 네가 물었다.

“당신은 애들이 몇이나 있어?”

“셋.”

전날은 둘이라더니 하루 사이에 막내를 기억했다.

“작은아씨는?”

“둘.”

작은 시누이네도 셋인데 둘밖에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다.


네가 K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하에 가서 약 갈아올게.”

“응.”

“당신도 내 손에 뽀뽀해야지.”

K는 힘없이 너의 손을 끌어다 입을 댔다.


주치의가 말했다. 사업가인 VIP 환자가 미국에서 온다고. 3일 안에 특실을 비워야 한다며 2인실과 6인실은 없고 특실만 있다고. 너는 특실로 가고 싶었지만 K의 형과 시어머니 등쌀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1985년 6월 10일. K는 기운 없고 어지럽다며 밥을 달라고 했다. 주치의한테 연락해 점심에 밥을 받았다. K는 천천히 반 공기를 받아먹었다.


너는 밥만 먹으면 K가 다 낫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냥 넘어가는 죽과 달리 밥은 우물거릴 때마다 오른쪽 입가로 질질 흘러내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K가 오후 내내 괴로워해서 왜 그러냐니까 안경이 쓰고 싶다고 했다.


안경!


네가 화장대 서랍에 넣으며 다시는 못 쓸지 몰라 눈물짓던 안경이었다. K의 형수한테 부탁해서 안경을 가져왔다. K는 안경을 써도 앞이 잘 안 보인다고 더 괴로워했다. 이어서 팔다리가 안 움직이고 말도 잘 안 나온다고 비관했다.


괴로워하는 K를 보니 가슴이 무너졌다.


병원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시어머니가 담담한 표정으로 너와 K의 형을 중환자실 밖으로 불러냈다.

”아무래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 딱해서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구나. 어차피 떠날 거 더 고생시키지 말고 편하게 보내주자. 어서 매형 매제랑 사촌 형 부르고 친척들한테 연락해라. 이대로 장례식장으로 내려가자꾸나!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네가 소리쳤다.

”어머니, 저는 살아있는 K를 관에 넣을 수 없어요!”


맞다. 그런 기막힌 대화를 나눈 날도 있었다.

뭐가 문제인가?

K가 살아있는데!


다시 괜찮아진 너는 전에 K한테 들었던 친구 이야기를 했다. 바람피우다 들통나서 아내를 상전처럼 모시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K는 언제 괴로워했느냐는 듯 뱃살을 잡고 웃었다.


자기 전에 아래로 미끄러진 몸을 네가 힘껏 끌어올렸다. K가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번쩍 들자 쑥 올라갔다. 네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자 따라서 좋아했다.


1985년 6월 12일.

6인실이 비었다고 했다.


6인실은 아직 무리일 것 같았으나 그마저 누가 입원해 병실이 없을까 봐 K에게 이러저러해서 입원실을 6인실로 옮기겠다고 했더니 선선하게 그러하고 했다.



대답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6인실로 들어가자 K는 또 왜! 왜! 하며 너의 멱살을 잡고 침대를 부술 듯 몸부림을 쳤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놀라 숨을 죽이고 너희 부부를 지켜보았다. K의 얼굴은 금방 검붉게 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K는 더 크게 소리며 탄식했다.

”아이고! 아이고!”


난동 소식을 듣고 온 주치의한테 특실로 옮기겠다고 하니까 벌써 다른 환자가 입원했다고 했다. 두 시간 넘게 괴로워하는 K를 보고 너도 소리 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네가 운다는 말을 전해 들은 수간호사가 달려와 K를 보더니 펄쩍 뛰며 저대로 두면 큰일 난다고 우선 신경과 회복실에서 진정시키자고 했다.


회복실로 온 K는 편하게 잠들었고 이틀 뒤 특실로 옮겼다.


너는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무능한 너를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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