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12 약속이 움직일 때

by 글마중 김범순

가족과 나

이웃과 나

사회와 나

국가와 나

모든 관계는 유언 무언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약속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틀 전 부동산에 전화를 했더니 논을 헐뜯으며 가격을 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기가 눌려 우리 논의 장점을 한마디도 못했다.


"시골 논은 잘 안 팔려요. 산다는 사람 있을 때 얼른 계약하게 내일 만나지요."


팔랑귀인 나는 승낙했고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괜한 약속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헐값에 넘기는 것 같아 논을 선물한 어머니한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매수자가 여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논이 마음에 꼭 든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못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세무서에 들러 상담 직원한테 양도소득세 계산법을 배웠다.

서식이 복잡해서 못 알아듣고 몇 번씩 물었다.

집에 와서 검산을 거듭하며 계산해 보니 세금이 꽤 많아 겁이 나서 징징거렸더니 아들이 말했다.


"친구들한테 알아봤더니 직접 벼농사지으면 8년 뒤에는 세금이 없고 직불금과 장려금도 받을 수 있대요. 혼자 속 썩이지 말고 진즉 나한테 다 털어놓지 그랬어요. 걱정거리는 나누면 반으로 줄고 좋은 방법까지 찾을 수 있거든요. "

새삼 아들이 듬직하고 고마웠다.


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

부동산 사장과 매수자 모두 남편 고향 후배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갈등 지옥을 헤매던 나는 우선 내가 편하고 싶었다.


“사장님, 그 가격은 도무지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동식물과의 약속까지 지키려 노력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약속을 움직였다.

신의를 저버려 사람이기를 포기하니까 더없이 고요하고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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