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퍼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혹시 환승연애2를 보셨나요? 저는 보진 않았지만 환승연애2를 챙겨보던 친구에게 결말까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결말을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시작은 무엇인가가 끝나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시작은 대개 설렘, 두근거림, 새로움이라는 단어와 곧잘 어울리곤 하지만 시작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걱정스러움의 감정을 더 자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두려움과 걱정스러움의 감정은 어쩌면 무언가를 완전히 끝냈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없다는 절박함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무엇인가를 끝낼 수 있는 용기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끝낼 때에는 두 번 다시 그 무언가를 찾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결심과 그 무언가를 떠올린다 하더라도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견고한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결심과 다짐을 지니고 용기를 내 마침내 무엇인가를 끝냈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완전히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시작이라는 단어를 꽤 오래 관찰하고 참 많이 곱씹어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생각이 정리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어의 결을 알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이루는 감정을 보아야 합니다. 시작을 이루고 있는 감정은 꽤나 모순적입니다. 설레고 기쁘고 두근거리는 감정과 두렵고 무섭고 걱정스러운 감정이 공존합니다. 마치 저희의 인생처럼 말이죠. 애초에 시작은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행복과 슬픔 사이에 머물며 양가적인 감정을 끊임없이 느끼는 우리는 시작이라는 단어를 이루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쉬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생은 시작의 연속인 걸까요. 그렇다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곤 할까요. 그 순간이, 그 타이밍이 바로 운명인 걸까요. 다시 깊게 생각하다 보다 보니 사랑이 왜 타이밍인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과 내가 사랑하는 이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이 맞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빈번하게 무언가를 시작하는데 그중에서 사랑을, 심지어 그 사랑을 두 사람이 동시에 시작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타이밍이 맞아야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타이밍이 맞아 사랑하게 되면 서로를 운명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의 엔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이 맞는다는 기적이 일어나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을 매번 흔하지 않은 사랑의 시작이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시작과 사랑은 굉장히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작과 사랑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나 알아가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사랑을 말하고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은 없습니다. 시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결심하고 용기 내고 시작한 일이 잘 되지 못해 상처받더라도 겸허히 수용하고 다시 한번 무언가를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상처받고 아파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일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반복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언제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해요. 그래서 시작은 사랑과 많이 닮아 있다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해 망설이는 것처럼 시작하기 좋은 순간을 우리는 선명하게 보지 못합니다. 시작도, 사랑도 떠올리면 기분 좋은 설렘으로 마음이 가득 차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모순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시작과 사랑이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가 예측되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단어들이었다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 재미없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시작도, 사랑도 타이밍이라면 일단 해보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뭐라도 해야지 타이밍이 맞을 여지가 생기니까요. 그렇다면 시작을 하기 더없이 좋은 구체적인 순간은 언제일까요? 사랑과 인생을 닮아 시작도 불분명함을 지니고 있지만 생각할수록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이 서 있는 그 계절과 어울리는 것이 꽃 한 송이든, 물 한 컵이든, 책 한 권이든, 캐럴 한 곡이든 지금이 무언가를 시작하기 완벽한 순간이라 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