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생각
오늘은 행복한 날이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눈이 내린다. 그것도 빼짝 마른 진눈깨비가 아닌 포동포동 살 오른 함박눈.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보며 점심을 먹다가 고민했다.
거실 창문으로 보는 눈도 좋지만 아무래도 커다란 통창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두 눈에 한가득 눈을 담고 싶으니까.
이왕이면 한강이 내다보이는 곳이 좋을까. 작년에 갔던 한강공원 스타벅스도 좋았는데.
그래도 공부든 뭐든 해야 하니 묵직한 노트북을 등에 매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땅 속에 머무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져 그냥 버스를 탔다.
멀리 갈 필요 있나.
사방이 통창으로 되어 있는, 심지어 공짜 커피도 있는, 어제도 갔던 청년센터로 가자.
중요한 건 '눈'이다. '눈'만 볼 수 있으면 충분하다, 오늘은.
버스에 앉아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로 내리는 눈을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솜이불을 덮은 가로수들, 우산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 모든 게 아름다웠다.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행복했다.
눈을 맞는 것도 좋지만 역시 따뜻한 실내에서 보는 게 제일 좋긴 하다. 마치 비도 그러하듯.
눈은 자꾸만 미래로 떠나는 나를 지금, 여기로 데려다 놓는 동시에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진빨강색의 단풍 위에 소복히 내려앉은 뽀얀 눈은 첫눈 내리던 날의 데이트를,
짙은 초록의 소나무를 뒤덮은 얼음 덩어리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따라 그어진 흰색의 선은 대만의 설산에서 봤던 고드름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를 먹으니 날리는 눈을 보며 떠올릴 추억도 늘어났다.
오늘 저녁이면 이 차가운 결정들은 자취를 감추겠지만 그래도 섭하지는 않다.
이제는 안다. 이 물방울들은 사라지지 않고 떠돌아 다니다 다시 눈이 되어 내릴 것임을.
잠시 멎었던 눈발이 다시 강해졌다.
굵지만 여전히 땅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흰 점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무래도 오늘은 '실컷 눈 구경하는 날'로 정해야겠다.
논문을 읽는 것도 좋지만 지금 창밖에 내리는 이 눈은 언제 또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까.
어쩌면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눈'이라는 게 있을 지도 모를 지구에 태어나서,
눈 내리는 겨울이 있는 한국에서 살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