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의 기차표와 함께한 자유의 일주일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02

by 끼미


타이베이를 떠나 대만 남부를 여행했던 2022년 3월 5일부터 3월 11일. 이 7일은 일 년의 대만 워홀 생활 중에서, 어쩌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TR PASS’라는 한 장의 기차표 덕분에.




TR PASS(Taiwan Railway PASS)는 ‘대만 기차 패스권’으로, 이것만 있으면 일정 기간 동안 고속열차인 까오티에와 특수 관광 열차를 제외한 대만의 기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내일로’처럼.


‘무제한 기차 탑승권’. 대만 남쪽 여행을 계획 중이었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구입했다. 학생용 7일권은 799위안, 한화로 3만 원 조금 넘었는데, 어학당 학생증 덕분에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겨우 3개월 다녔던 어학당이 남겨준 엄청난 혜택이었다.


행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패스권 사고 저녁에 알바하러 갔더니, 아니 글쎄 허광한이 온 게 아닌가! 3개월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그가 하필 그날! 마치 내 기차 여행을 응원해주러 나타난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행복한 기차 여행이 될 징조였다.


학생용 TR PASS의 모습


예감은 적중했다. TR PASS 한 장 들고 기차 여행 다녔던 일주일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먹고 놀기만 하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이 7일이 유달리 행복했던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돈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덕분이었다.


이 표 하나만 있으면 기차를 하루에 한 번 타든 열 번 타든, 돈이 안 든다는 건 나 같은 짠순이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다(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일주일 동안 TR Pass 한 장 들고 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교통비 생각에 여행 가고 싶어도 주먹 쥐고 참았던 지난날의 한을 풀었다. 특히, 표값이 내 한 끼 밥값보다 비쌌던 타이동 가는 기차에 현금 대신 달랑 패스권 한 장 보여주고 탔을 때, 마치 신이 된 것 같았다. 이 세상이 전부 내 것이라 뭘 해도 공짜인, 그런 신.


차비 걱정이 사라지니 짠순이의 마음에 자비가 흘러넘쳤다. 한 번은 역시 TR PASS 덕에 (기분상) 공짜 기차 타고 타이난에 있는 드라마 <상견니> 속 빙수 가게를 찾아갔던 날이었다. 그런데 분명 구글 지도상에 영업중이라던 가게가 문이 닫혀있는 거였다.


평소라면 짜증을 내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이거 하나 때문에 왔는데 괜히 차비만 버렸다면서. 하지만 이날은 ‘내일 다시 오지 뭐!’ 하고 쿨하게 뒤돌아섰다. 내일 기차 한 번 더 탄다고 돈 더 내는 것도 아니니까. 3만 원짜리 TR PASS에는 짠순이를 부자로 변신시켜주는 마법의 힘이 담겨 있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대만 기차역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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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동 가는 기차 안에서


기차 안에 지갑 두고 내렸던 날도 그랬다. 기차 타고 돌아다닌 지 5일째, 계속되는 빡센 여행이 무리였는지 전날 밤새 몸살을 앓았지만 TR PASS 뽕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또 기차를 탔었다. 그러다 결국 돌아오는 기차 안에 지갑을 두고 내린 것이다. 몸살 기운에 취해 헤롱헤롱한 정신으로.


다행히 네 정거장 떨어진 역에서 내 지갑을 보관하고 있으니 가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더 다행이었던 건, 가방 앞주머니에 TR PASS가 들어있었다는 거였다. 현금도 카드도 없는 그 상황에, 나를 지갑이 있는 그곳까지 데려다줄 무적의 기차표가.


만약 TR PASS가 없었다면, 지갑 분실 사태는 ‘찾았으니 됐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짠내만 가득했던 그때의 나는 분명히 또 스스로에게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기차표 뽕 뽑을 생각에 꾸역꾸역 나왔다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고, 돈 돈 거리다가 괜히 안 써도 될 기차표값만 더 쓴다고, 이래서 니가 안 되는 거라며, 가뜩이나 속상한 마음을 더 너덜너덜해지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 비극적인 결말을 TR PASS가 막아줬다. 여러모로 한심한 나를 자책하는 대신 혹시나 해서 돈과 기차표를 분산 배치해뒀던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하며, 예상치 못했던 기차 여행을 즐겼다. 무적의 기차표 덕분에 1위안 한 푼 더 들이지 않고 그 기차역에 가서 지갑을 찾았고, 돌아가는 기차 기다리는 동안 근처 야시장에서 매콤한 삼겹살 볶음을 넣은 대만식 찐빵 샌드위치인 꽈바오도 사 먹었다. 모두 TR PASS가 있어 가능했던 해피 엔딩이었다.


TR PASS와 함께 했던 일주일. 원 없이 기차 타고 떠돌아다녔던 그 7일은 ‘돈 아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자신을 싫어하던 나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간이었다.


TR PASS 덕분에 무사히 찾을 수 있었던 지갑
지갑 찾으러 갔다 야시장에서 사 먹은 대만식 찐빵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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