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기 전, 마지막 타이중 여행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01

by 끼미


타이베이에서의 워킹 홀리데이가 끝나고 시작된, 워킹 없는 찐 '홀리데이'. 한국 돌아가기 전까지의 남은 시간을 가오슝에서 보낼 예정이었지만, 그전에 들린 곳이 있었다. 바로 타이중이었다.


이미 네 번이나 갔었고 더는 새로울 것도 없다 생각했던 도시, 타이중. 그래도 귀국 전에 한 번은 다시 가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인생의 마지막일 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비용 문제도 있었다. 고속열차인 까오티에 타고 타이베이에서 가오슝까지 바로 가는 것보다 버스 타고 타이중까지 갔다가 다시 가오슝 가는 게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돈도 아끼고 여행도 하고. 타이중에 다시 갈 이유로 충분했다.




맥주 없는 맥주 공장 여행


마지막 타이중 여행에서는 꼭 가보고 싶었던 두 곳을 들렀다. 첫 번째 장소는 타이중에서 기차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난 맥주 공장(竹南 啤酒廠)이었다.


처음엔 갈까 말까 망설였다.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기차역에서 도보로 30분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갔다. 벽에 커다란 맥주병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그 맥주 공장에서 쌩맥 한 잔 마시며 축하하고 싶었다. 지독히 외로웠던 밤마다 방구석에서 혼자 대만 맥주를 홀짝이며 버텨낸 나를.


나만의 축하 여행은 아쉽게도 절반만 성공했다. 공장에서 갓 만든 생맥주 판매가 코로나 사태로 중지된 상태였다. 대신 기념품샵에서 판매하는 병맥주를 한 병 사 마실까 고민하다가 결국 맥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공장에서 빠져나왔다. 암만 비싼 맥주라도 지금 이 기분으로 혼자 마신다면, 김 다 빠진 뜨뜨미지근한 맥주 맛이 날 거였다.


그럼에도 인중에 맺힌 땀을 닦으며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인터넷에서만 봤던 거대한 대민 맥주 벽화들은 실제로 보니 웅장하면서도 귀여웠다. 첫 대만 여행 때 마셔보고 홀딱 반해 캐리어 가득 쟁여 갔던 망고 맥주부터 첫 번째 쉐어하우스에서 만났던 하우스 메이트가 알려줘 마셔봤던 18일 생맥주, 이것저것 마셔보고 찾아낸 최애 맥주 쑤앙(爽) 맥주까지. 이제는 카스 맥주보다 더 익숙해진 대만 맥주 그림에 대만에서 보냈던 쌉싸래한 시간이 전부 담겨 있었다.


주난 맥주 공장에 그려져 있던 대만 맥주들


맥주를 눈으로만 구경했던 맥주 공장 방문. 사실은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보다 그 전후의 과정이 더 좋았다. 맥주 공장 가기 전, 기차역 바로 앞 가게에서 무를 갈아 계란과 함께 부쳐낸 무떡을 사 먹었는데 20분 남짓했던 그 식사 시간이 참 평화로웠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파란 하늘 올려다보며 먹었던 무떡. 소박하지만 달큰했던 점심이었다.


공장 방문 후도 그랬다. 비싸도 맥주 사 마실 걸 그랬나 하며 돌아온 치딩(崎頂)역. 그곳에서 짠순이 여행자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는데, 철로 너머로 보이는 새파란 바다 덕분이었다. 그 반대편 바다에는 풍력 발전기들이 케잌 위의 생일 초처럼 바다에 꽂혀 있기까지. 그저 맥주 공장을 오가기 위해 들린 기차역이지만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타야 할 기차 한 대를 그냥 보냈다. 바다와 기차. 이 사랑스러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주난 맥주 공장 방문은 그런 여행이었다. 마시고 싶었던 맥주는 맛도 못 봤어도 오가는 길에 만났던 행복이 허전함을 채워주었던 여행. 타이중에 다시 오길 역시 잘했다.


맥주 공장 가기 전, 작은 가게에서 사 먹었던 무떡
역에서 기차 기다리며 감상한 바다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워


주난(竹南)역에 내려 맥주 대신 우롱차 한 잔을 사 마시고 다시 기차를 탔다. 마지막 타이중 여행의 최종 목적지, 까오메이(高美) 습지에 재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재방문’. 그렇다. 까오메이 습지에는 이미 가본 적 있다. 7년 전 세 번째 대만 여행이자 첫 타이중 방문 때 그곳에서 인생 노을을 감상했었다. 그래서 꼭 다시 가고 싶었다. 야트막한 물에 두 발 담그고 봤던,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던 노을과 재회하러.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7년 동안 우울할 때마다 까오메이 습지를 떠올리며 기운 냈듯이.


까오메이 습지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청수(清水)역에서 내렸다. 첫 방문 때는 버스를 탔었지만, 이번에는 패기롭게 자전거 타고 가기로 했다. 구글 맵에 따르면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마침 역 앞 게시판에 까오메이 습지까지 가는 자전거 도로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청수역 앞에 붙어 있었던 자전거 도로 안내도 / 대만의 공공 자전거인 유바이크


이제는 서울의 따릉이보다 더 익숙해진 유바이크(대만의 공공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서쪽 바닷가를 향해 달렸다. 먹구름 가득 드리운 하늘 아래 바닷바람 맞으며 달리는 기분.


울고 싶었다.

페달을 세게 밟아도 도무지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거세지는 맞바람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까오메이 습지까지 가야만 자전거 반납 장소가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탓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페달을 밟았다. 그야말로 ‘울며 자전거 타기’였다.


멍멍 고생 끝에 도착한 까오메이 습지. 기운이 빠졌다. 그곳은 내 기억 속의 그 고미 습지가 아니었다. 기대했던 노란빛 노을은 먹구름 사이 아주 좁은 공간에만 수줍게 칠해져 있었고, 그때 그 사랑 넘치던 분위기는 없고 을씨년스러운 칙칙함만 있었다.


여기가 까오메이 습지인지 서해안 갯벌인지 아무도 모를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가는 버스 안.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이제 까오메이 습지는 눈부신 노을 대신 오늘의 이 고생으로 기억되겠구나. 눈물 닦느라 시뻘게진 눈가가 따끔거렸다.


기대했던 노을 대신 칙칙한 하늘이 있었던 까오메이 습지


고생한 만큼 저녁은 정말 맛있는 걸 먹기로 했다. 반미 샌드위치. 몇 달 전 한국인 동생 J와 첫 타이중 여행 왔을 때 사 먹고 반했던 그 샌드위치였다. 그때와 똑같은 맛의 샌드위치를 들고 근처 공원에 갔다.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맛있지만 그 맛이 아니었던 반미 샌드위치

까오메이에서와 달리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아직 따끈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물었다. 바삭한 쌀 바게트와 달짝지근한 돼지고기, 상큼한 무절임 그리고 매콤한 칠리 소스.


또 한 번 맥이 빠졌다. 그때 그 맛이 아니었다. 물론 그 고생을 하고 먹으니 맛있긴 했지만, 처음의 그 감동은 없었다. 그땐 J의 것까지 뺏들어 먹고 싶을 만큼 천상의 맛이었는데, 몇 달 사이에 내 입맛이 바뀐 걸까 아니면 맛이 달라진 걸까.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J가 없어서. 그때 공원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함께 나눠 먹었던 J는 한국으로 돌아간 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예상했었다. 연말 카운트다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멀어졌으니까. 내 잘못으로 J가 떠나간 것 같단 추측과 그러니 그리워할 자격도 없다는 후회. 똑같은 가게에서 산 반미 샌드위치가 그때 그 맛이 안 나는 이유였다.


어쩌면 추억은 추억이어서 아름답고 맛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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