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의 버킷 리스트, 대만 환도 성공하던 날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03

by 끼미


연회색 먹구름이 가득한 오후 3시 반. 타이동의 어느 바닷가에 앉았다. 대만 기차 무제한 탑승권인 TR PASS의 마지막 날이었던 오늘, 아침 6시부터 기차를 타고 또 탔더니 꽤 피곤했다. 눈앞의 드넓은 바다처럼 시원한 타이동의 대표 차(茶), 홍우롱차(紅烏龍茶)를 마시며 긴 하루를 돌아봤다. '대만 환도(環島)' 미션을 완료한 오늘을.




대만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대만 환도(環島)’는 대만 워홀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정석대로라면 우리나라의 국토 대장정처럼 며칠에 걸쳐 한 번에 섬을 돌아야 하지만, 오토바이도 차도, 걸을 용기도 없어서 나만의 대만 환도를 하기로 했다. ‘대만의 동서남북 다 가보기’.


타이베이에서 지내는 동안 틈틈이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미션의 80%를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가보지 못한 구간이 있었다. 가오슝(高雄)에서 타이동(台東)으로 이어지는, 타이베이에서 멀고 먼 구간. 오늘이 바로 이 구간을 개척하는, 대만 환도의 최종 미션일이었다.


미션 수행은 이제 막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른 새벽에 시작됐다. 오전 6시 40분, 타이동행 열차가 가오슝역에서 출발했다. 초록빛 논들이 펼쳐진 익숙한 풍경을 지나자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나타났다. 아침 햇살 받은 바다는 하얗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내 방 의자처럼 편안한 기차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했다. 한때 유행했던 시트콤 대사가 떠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7일간의 기차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IMG_6731.PNG
IMG_6751.JPG
(좌) 이날의 기차 여행 경로 / (우) 타이동 가는 기차 안에서


타이동역에 오기 전, 먼저 두 곳을 들렀다. 타이동 4역 전인 뚜오량(多良)역 그리고 타이동을 지나 더 북쪽에 있는 관산(關山)역이었다. 뚜오량역은 지금은 기차가 안 다니는 폐역이라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가보고 싶어 들렀다. '대만에서 가장 아름답고 핫한 기차역'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소문대로였다. 평일 오전이지만 뚜오량역에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워 하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혼자 온 나도 삼각대의 도움으로 핫플에 왔다는 인증샷을 남겼다. 예상치 못한 득템도 했다. 역 앞 가판대에서 타이동의 특산품인 석가(釋迦)를 네 개나 샀다. 한 개에 단돈 20위안, 한화 약 천 원이라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꽤 무거웠지만 괜찮았다. 한국 가기 전에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설렜다.


IMG_6813.jpg
IMG_6951.JPG
(좌) 대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인 뚜오량역 / (우) 역 앞에서 산 타이동의 특산품 석가


석가와 함께 기차 타고 한 시간을 더 달려 관산역에서 내렸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역 앞 가게에서 삐엔땅(便當, 대만식 도시락)을 사와서 역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 먹었다. 대만 살이 10개월 차. 야외에서 삐엔땅 까먹는 건 이제 전혀 쑥스럽지 않았다. 완전 대만 사람 다 됐다.


배를 채운 다음, 다시 기차 타고 루예(鹿野)역에 갔다. 해마다 열기구 축제가 열린다는 루예 고원에 가려 했지만, 다음 버스가 한 시간 뒤에나 온다길래 포기하고 뒤돌아 섰다. 어차피 축제 기간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다가 혼자 짜증내는 것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심신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IMG_6996.JPG
IMG_7013.jpg
(좌) 관산역 가는 길의 풍경 / (우) 관산역에서 먹은 삐엔땅


그렇게 타이동 바닷가에 왔다. 일주일간의 기차 여행, 몇 달에 걸친 대만 환도 미션의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솔직히 오늘 기차를 타고 또 타면서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난 대만 사람도 아니고 여행 유튜버도 아닌데 대만 환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쓸데없이 TR PASS 값 뽕 뽑기에, 대만 환도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내가 만든 목표의 의미를 의심했다.


그러나 조금 전, 무거운 두 다리를 모래사장 위에 쭉 뻗고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즐거웠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의미가 있건 없건, 기차 타고 대만을 탐험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날마다 조금씩 나만의 대만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게 재밌고 뿌듯했다. 지리 전공자여서 더 그랬던 건진 몰라도.


중국어 마스터하기와 대만 친구 많이 사귀기는 실패했지만, 7일간의 빡센 기차 여행과 대만 환도 미션은 성공했다. 긴 여정을 끝내고 만끽하는 '해냈다!'는 뿌듯함, 이 성취감이야말로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거듭된 실패로 움츠러들어 있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바로 이런 자신감이었으니 말이다.


옆에 내려두었던 석가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정한 하우스 메이트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만에서의 세 번째 쉐어하우스, 가오슝 그 집으로.


IMG_7048.JPG
IMG_7083.PNG
(좌) 타이동 해변에서 마신 홍우롱차 / (우) 이날의 기차 여행으로 완성된 나만의 대만 지도


keyword
끼미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249
이전 02화무적의 기차표와 함께한 자유의 일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