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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야, 노올자(들풀 어른동화 1)

오늘의 말수는 공원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by 들풀

바람이 제법 더운 기운을 품은 초여름의 저녁나절입니다. 말수는 아침으로 곱삶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억지 배를 채우고, 점심은 건너 뛰었습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고구마 두 개로 긴 여름 낮의 주린 허기를 달래기도 했지요. 말수의 배는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말수는 코를 팽 풀고는 땡감물로 얼룩덜룩한 난닝구에 손을 쓰윽 문지릅니다.

아휴, 배고파

말수는 허공에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종아야! 노올자!"

"복아! 노올자!"


아이들은 말수의 소리에 마치 화답이나 하듯이 촐래 촐래 광장에 모입니다.


"다스께또(진놀이,우리는 왜말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그렇게 불렀다.) 할 사람 요게 요게 다 붙어라!"


아이들은 말수의 엄지손가락에 손가락을 급하게 붙입니다. 말수와 종아가 묵, 찌, 빠를 합니다. 먼저 말수가 이겼습니다.


"나는 바우!"


말수의 볼이 발그레 변합니다.


"나는 오야!"


종아는 친한 친구를 뺏긴데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립니다.


묵 찌 빠, 그런데 말수는 와이리 크게 그렸노?

"종아, 니는 우리 편이다"

"진때(진지)는 돌방아(연자방아)고, 종아 너거가 술래다."


말수와 아이들은 왁자하게 고함을 지르며 달아납니다. 여섯살 <철이>가 오야에게 먼저 잡히고, 동작이 굼뜬 <범>이 잡힙니다. 종아가 말수를 잡으려고 쫓아옵니다.


"종아 이눔아야, 니는 어제 굼벵이를 삶아 묵었나?"


말수가 혀를 쏙 내밉니다. 종아는 뿔이 나서 찢어진 진짜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을 손에 쥐고 내달립니다. 말수가 종아한테 드디어 잡혔습니다. <철이>가 진때(진지)에 손을 대고 다른 한손은 <범>을 잡고 범의 다른 손은 말수와 맞잡습니다.


"손을 단디 잡아라이!"


말수가 눈짓을 합니다. 진동댁 아지매가 물을 그득하게 담은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옵니다. 그런데 갈래머리가 아지매의 허리춤 쯤에서 나폴나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말수가 진동아지매 쪽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로 급히 달려갑니다.


"께또!"


자야가 말수의 손을 탁 칩니다. 아이들은 손 사슬에서 해방되어 우르르 달아납니다.


"반칙이다. 추접스럽게 물을 이고 있는 아지매 뒤에 숨어서 오는 게 어딨노?"


종아가 씩씩거리며 버럭 버럭 고함을 지릅니다.

께또!

"종아야, 밥 묵으러 온나!"


종아 엄니가 고함을 지릅니다. 술래만 하다가 맥이 빠져 있던 종아는 엄니의 말끝을 쫓아 슬레트 집으로 들어갑니다. 깜깜한 집들에 하나, 둘 호롱불이 켜집니다. 바우가 가고, 철이가 가고, 복이가 집으로 갑니다.


"말수야, 나도 밥 묵으러 간다."


자야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제 광장에는 말수 혼자만 남았습니다. 말수는 비틀거리며 서 있는 초가집을 다시 쳐다 보아도 여전히 깜깜합니다. 남의 밭 일을 하러 간 엄니는 아직도 올 기척이 없습니다. 아침 한끼로 허전한 말수의 배는 더욱 꼬르륵 아우성을 내지릅니다.


말수는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립니다. 물을 바가지 채로 훌툴 훌툴 먹습니다. 찬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쓰라린 기운이 잠시 몰려 옵니다.


"범아, 노올자!"

"바우야, 노올자!"

"종아야, 노올자!"


이미 저녁밥을 먹었을 아이들을 향해 말수는 힘없이 소리를 내지릅니다. 소리는 잠시 저녁공기를 흐트러뜨리다가 이내 잠잠합니다. 말수는 깜깜한 오두막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갑니다. 그러다가 말수는 집 앞 뽕나무 그루터기에 풀썩 주저 앉아 하늘을 봅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초가집을 감싸고 낮게 드리워져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별아, 나하고 노올자

"별아, 나하고 노올자!"


선듯한 바람이 말수의 이마를 훑고 지나가는데.. 말수의 눈에서 마알간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립니다. 말수는 하늘을 향해 가슴을 내밀고 크게 한숨을 내뿜습니다. 그러자 풀벌레소리들이 말수 곁으로 우르르 몰려듭니다.


2025. 10. 24. 들풀 ★


[별벗의 한 줄 평: 배고팠지만 서로 어우러지며 궁핍을 쫓았던의 그 시절, 그 따뜻한가난함이 오늘의 풍요보다 더 그립다.]

※그림은 한줄평을 써준 제 친구 별벗(CHAT-GPT)이 그렸습니다.


#들풀어른동화 #들풀책쓰기 #들풀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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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