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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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일그러진 내면에선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톱니바퀴는 이미 멈춰버린 듯했다. 어쩌면 새겨줄 추억마저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이미 심연 속에 갇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큰 불행에 지난 행복을 은연중에 부정하고 있으니, 추억은 심연 속에 갇힌 게 아니라 그녀가 직접 가둔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도 자세히 보면 옅은 빛이 있어.
한때 밝았던 빛마저 바래가는 중이겠지만 그 정도는 우리가 다시 밝혀주면 그만 아니겠어? 작은 빛줄기 하나지만 어떨 때는 그 빛이 커지고 커져 어둠을 완전히 덮어줄 때가 있거든.
작은 눈송이는 특유의 능글맞은 톤으로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난 일말의 빛을 찾아 키워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시야를 감았다 바라본 캄캄한 그녀의 내면에서 잠깐 빛나던 불빛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불빛 안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다 함께 해수욕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일렁였다. 그녀의 아이들이 훨씬 더 어릴 때인 듯했다. 물에 젖은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과 그 옆에서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짓는 미소가 오뉴월의 햇살이 깃든 것만 같았다. 너무나 따뜻해 부러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나로 잔잔한 물결이 바다라는 화폭에 그림을 그렸다. 나는 절대 볼 수 없을 푸르고 푸른 여름날의 풍경이다. 그녀의 손을 남편의 손이 감싸고 있었고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잠시나마 바다의 노랫소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비록 흐리게 비추어진 기억일 뿐이지만 나도 그곳에서 함께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해수욕을 했던 바다에서 불꽃축제가 있었다. 어린아이 둘이 나란히 손을 잡고 빈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 뒤에 붐비는 사람 사이 분주하게 아이들을 챙기는 그녀와 그녀 남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폭죽이 터져 오르며 황홀한 불빛이 검은 어둠을 밝혀준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일었다. 폭죽과 바다의 멜로디가 완벽한 여름을 만들었다.
그 한순간의 기억이 그녀의 내면을 모두 밝혀줄 한 줄기의 빛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에게 전하는 눈꽃의 향기는 훨씬 더 진하게 그려냈다. 그녀에게서 잊히지 않도록, 내면에 어둠이 찾아오려고 할 때마다 빛줄기가 내면을 밝혀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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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빈집인 듯 싸한 공기가 느껴졌다. 자취방을 보러 간다던 둘째 아들의 말이 기억났다. 완전히 혼자인 기분이었다. 그녀는 비어버린 집을 뒤로하고 곧장 세탁기를 돌렸다. 그리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를 꺼내 집을 청소했다. 진공청소기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거실 장판을 들고 그 아래까지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청소를 했다. 청소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세탁기는 익숙한 종료음을 들려주었다. 한가득 세탁기에 넣었던 옷과 수건을 꺼내 빨래를 널었다. 물에 젖은 빨래를 만지니 손에 물기가 묻어났다.
내일이면 비춰오는 창문 너머의 볕에 완전히 말라 있을 거면서 지금은 찬 물기에 푹 젖어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오늘따라 강하게 느껴진다. 건조가 덜 된 듯한 수건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녀의 시야 끝에 위치한 물방울은 투명했다.
소리 없이 찾아온 밤, 그녀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하루에 끝자락에 서 있었다. 잠이 안 오는 밤에 그녀는 생각에 잠긴다. 홀린 듯 깊은 밤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손잡이를 잡아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두었다. 그 틈으로 찬 공기가 금세 들어왔다. 겨울바람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기에 그녀는 별 하나 없이 빈 밤하늘을 찬 바람을 맞으며 응시했다.
어느새 열어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눈꽃의 향기가 그녀에게 따뜻했던 여름을 전해주고 있었다. 밤하늘에 시야를 둔 채로 멍 때 리던 그녀가 순식간에 추억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떠난 가족 여행, 그녀의 눈에 유독 푸르던 여름날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별이 하나도 없는 밤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어느새 머릿속에 재생되고 있는 그날로 되돌아갔다.
불꽃 축제로 붐비던 바닷가에서 불꽃이 터져 오르기 전 적막이 스칠 때 모두가 숨죽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도 가족들과 나란히 손을 맞잡고 서있었다.
큰 소리가 나고 불꽃이 번쩍.
순간 분주하던 정신은 잃고 넋을 놓게 되는 폭죽의 모습이었다. 폭죽과 함께 일말의 근심마저 터져버렸다. 언젠가 다시 메워오겠지만 당시엔 마냥 편안한 순간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폭죽은 보라색이었다. 짙은 색이 까만 배경과 잘 어울렸다. 이어서 새로운 빛깔의 폭죽이 터지는 순간, 그녀는 아이들에게서 손을 떼고 남편과 잡은 손을 움켜쥐었다. 한 장면에 푹 빠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스쳐 지나가며 흘끗 보았던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정신이 좀처럼 깨며 다시 빈 밤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에 창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새벽에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원래 꿈을 잘 꾸지 않았던 그녀지만 오랜만에 자각몽을 꾸게 되었다. 꿈속은 밝은 하늘에 구름이 일렁였다. 그녀의 손에는 자주색 안개꽃이 들려있었다. 작은 꽃잎이 퍼져있는 모습이 폭죽이 터진 모습과도 닮았다.
보라색 안개꽃, 영원한 사랑.
남편이 그녀에게 처음 주었던 꽃 선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꿈속에 꽃을 쥔 그녀의 앞에는 남편이 웃음 짓고 있었다. 안개꽃의 꽃잎은 아름다웠고 그 향기는 달콤했다.
깊게 잠든 그녀는 방 안 가득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에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아들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엄마, 아빠 깨어났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한마디에 오던 잠이 모두 날아갔다. 아들은 출근 시간에 병원 면회 겸 들른 병실에서 깨어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자마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지금 갈게”라고 답한 후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마 꿈속에서 그녀의 남편이 건넨 안개꽃은 오랜만에 전하는 인사였던 듯했다.
반갑다는 한마디 말이다.
그녀가 집을 나서는 발을 내디디는 순간 그녀 내면의 암흑에도 화려한 불꽃이 터져 올랐다.
밝아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톱니바퀴는 낡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